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16세기에 정군에 대해 번을 세우거나 조련하는 대신, 보인에게처럼 포를 거두는 관례적인 제도.
[개설]
정군(正軍)으로 복무하지 않고 대신에 포를 거두는 제도는 두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중앙 관사와 군문(軍門)에 소속된 정군의 경우에는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라고 하였다. 반면 지방 군영의 유방정병(留防正兵)의 경우에는 방군수포제라고 하여 둘을 구분하였다. 하지만 그 기본 형태와 방법은 서로 같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세기에 들어 조선초기의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붕괴되면서, 정군으로 부병하지 않고 대신 포를 바치는 대역납포(代役納布) 현상이 관례화되기 시작하였다. 방군수포는 정군의 입번(入番)을 놓아 주고 군포를 거둔다는 의미로 처음에 베의 수요가 해당 군영 수장들의 사욕을 채우는 데에 사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거론되었다. 하지만 방군수포 시행의 핵심은 급료를 비롯한 군사 재원이 자의적으로 운용되는 점에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세기 말 각 포(浦)의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은 당번의 선군(船軍)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입번(立番)하지 않으면 월령(月令)이라 하여 매 1월당 베 3필 또는 쌀 9말씩 징수한 예가 있었다[『문종실록』 1년 5월 25일].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휘관의 사리(私利) 축적을 위해 월령을 징수하는 예가 잦아졌다. 이와 같은 불법 행위는 지방군의 경우 군사 감독권이 지휘관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으며, 특히 대역인(代役人)이 개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자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거두어들인 재화는 모두가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와 그 수하 관속들의 사적 점유물이 되었다. 그 결과 병영·수영의 거진(巨鎭)에도 실제 역에 종사하는 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형세 아래 “모 진의 장(將)은 그 가격이 얼마이고 모 보(堡)의 관(官)은 얼마이다.” 하고 공언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채수(債帥), 즉 빚쟁이 장수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21년 6월 17일].
그 후 비상시의 재정 수요 발생에 대응하여, 혹은 지방관이나 장교의 사리 추구를 지탄하면서 방군수포 사례가 계속 언급되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방군수포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장교의 급료 지급이 건의되었다. 병사와 수사는 월급이 없어 방군수포를 거두지 않으면 먹을 식량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변천]
18세기에 군액을 정액화(定額化)하여 군역 재원의 수입을 확정하기 전까지 방군수포는 단지 지방관이나 장교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군역자가 소속된 군영의 재정 보완책으로 활용되어 왔다. 방군수포에 대한 금지는 국가 공공기관의 재정을 통제하는 중앙집권화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방군수포는 군포를 정군에게 직접 납부하는 보인 이외에 해당 기관에 포를 납부하는 보인이 출현함으로써 확대·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시대의 군역과 균역법」, 『한국의 사회와 문화』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이태진, 「조선 전기 군역의 포납화 과정」,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