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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말 조선초에는 직첩·직함은 있지만 직사가 없는 무직사관이나 직역이 없는 사족 자제 등을 가리켰으나 조선후기에는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
[개설]
조선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 뒤로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무예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말부터 사족 자제 중에 군역을 피하려고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채 직역(職役)을 갖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당하려 하였다.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경성에 거주하면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소속되어 숙위(宿衛)하는 한량에게는 과전을 지급하고, 외방에 거주하는 한량에게는 군전(軍田)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초기에도 사족 자제 중에 직역이 없는 자를 군역에 편제하여 조선초기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사족 자제로서 경제력이 있으면서 무예를 수련하는 자들에게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3년 3월 8일]. 중종대부터는 그들에게 무과 응시를 허용하였다. 이들은 군역 복무에 그치지 않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고, 향촌에 유향소(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 자치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갔다.
15세기 말 이후 흔히 ‘한량 자제(閑良子弟)’로 불리는 새로운 한량이 거론되었다[『세종실록』 19년 3월 1일]. 이들은 나이가 20세가 넘고 재산도 있고 유학과 무예도 어느 정도 익힌 사족·평민의 자제들로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아니고 군역도 지고 있지 않은 부류였다. 이들은 호적에도 올라 있지 않아 과거 시험도 치를 수 없어서 양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조사하고 그 재능을 시험하여 고급 군인으로 선발하기도 하고 강제로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량의 존재는 계속 늘어가기만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무과와 잡과(雜科)를 응시하고자 준비하는 자를 한량이라 불렀다. 무반(武班) 집안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정조대의 『무과방목(武科榜目)』에는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은 모두 한량으로 불렀다.
호적상에는 평민 중 상층이면서 군역을 지지 않고, 양반을 칭하지는 못하지만 양반 지향적인 자를 한량이라는 직역명으로 기재하였다. 19세기 호적에는 수많은 평민들이 ‘유학(幼學)’을 기재하여 신분을 상승하려고 하였는데 한량은 이때에 그 중간 과정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이준구, 『조선 후기 신분 직역 변동 연구』, 일조각, 1993.
■ 한영우, 「여말선초 한량과 그 지위」, 『한국사연구』 4,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