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후기에는 오가작통법 등에 의하여 어떤 사람이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그 이웃에게 연대 책임을 묻는 제도가 있었다. 군역의 경우에도 부담자가 너무 빈곤하거나 특별한 사정으로 군포를 납부하지 못하면 가까운 이웃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군역을 대신 부담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징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가까운 이웃은 한자어로 ‘절린(切隣)’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겨린’이라 하였는데 이웃집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세 집을 ‘삼절린(三切隣)’ 또는 ‘세 겨린’이라 하였다[『중종실록』 33년 9월 30일]. 어떤 사람이 사정상 군포를 내지 못하면 삼절린에게 군포 납부의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인징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제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일정한 양의 군포를 징수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군현에 맡겼으므로 실제로 지방 고을에서는 인징이 관행으로 이루어졌다.
단순히 군포를 내지 못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하거나 죽은 경우에도 인징이 적용되었다. 나라에서는 필요한 군사의 수와 그 군사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보인의 숫자를 책정하여 군총(軍摠)을 정하고, 그 군총을 군현의 대소에 따라 적절히 나누어 배정하였다. 따라서 군현 안에 도망·사망이나 나이가 늙어 군역을 면제받을 사람이 생겨도 군현에서 납부해야 할 군역의 총량은 바뀌지 않았다.
만약 도망·사망으로 군적(軍籍)에 빈자리가 생기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 다른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워서 군적을 새로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도망자나 사망자의 가족이 없거나 가족까지 모두 도망한 경우에도 누군가가 그 세금을 대신 부담해야 했다. 빈자리에 채워 넣을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도망자·사망자의 이름을 그대로 두고 군포를 이웃집 사람에게서 징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