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호전(戶錢)은 18세기 전반에 상당히 유력하게 논의되던 양역변통책 중 하나였다. 양인의 인신에 부과하는 양역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집마다 일정액을 부과하는 호전이 논의되었다. 대개는 가호를 식구 수에 따라 대호·중호·소호 등 몇 가지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부과하려 하였다. 초기에는 포를 부과하여 호포제로 시행하려 하였으나 징수 수단을 포목에서 돈으로 바꾼 것이 호전이었다.
[내용 및 특징]
호전이나 호포 모두 결국 가호에 부과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징수 수단이 포인가 돈인가에 따라 호포와 호전으로 나뉘었다. 쌀이나 포목 대신에 돈을 내라고 하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반대도 있었다. 돈으로 거둘 경우 동전이 많이 유통되지 않아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목으로 거둘 경우, 포목의 질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농간이 생길 수 있었다. 결국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포를 돈으로 거두기로 하였다.
[변천]
호전이 거론된 것은 숙종 말년부터였으나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제정하기 직전이었다. 영조는 처음부터 양역변통책의 하나로 호포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호포는 박문수(朴文秀) 등의 건의에 따라 호전으로 바뀌었다[『영조실록』 26년 5월 17일]. 1750년 감필(減疋)을 결정짓기 직전, 5월 한 달 동안 호전을 부과하는 방안에 대하여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영조는 포목이나 돈을 바치는 양역을 모두 없애고 그 재정 결손은 호당 5전 정도만 부과하면 해결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액수를 산출하여 호당 부담을 확인해 본 결과 예상과 크게 달랐다. 대호(大戶)에 배정되는 액수는 2냥을 넘고 대호·중호·소호 평균을 잡아도 1냥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양역을 완전히 없애고 호전을 시행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고 모자라는 1필 부분만 호전을 징수해서 해결하는 감필호전(減疋戶錢)에 대하여 논의하였다[『영조실록』 26년 7월 3일]. 그러나 이 안 역시 가호의 색출을 가혹하게 해야 했고, 대호에 1냥을 부과해도 50,000냥의 재정 수입이 부족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반층의 반발이 강하였다. 결국 감필호전마저 포기하고 감필결포(減疋結布)를 기본으로 한 균역법이 1751년(영조 27)부터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