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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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儒布)

서지사항
항목명유포(儒布)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군포(軍布)
관련어양역변통(良役變通), 호포(戶布)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양인에게 군포를 부과하듯이 양반에게도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

[개설]
유포론은 양반에게도 일반 평민처럼 포(布)를 부과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목적과 성립 배경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 최명길(崔鳴吉)은 유포가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유계(兪棨)는 양역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 박세당(朴世堂)은 평민·천민에게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유포론은 17세기 전반에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기되었다. 처음 제기한 사람은 최명길이었다. 양란 이후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1624년(인조 2) 최명길은 양인에게 군포를 부과하듯이 사족에게도 유포를 부과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1654년(효종 5)에는 김육(金堉)·김익희(金益熙)가 양반에게도 해마다 1필 또는 2필을 거두자고 하였다. 이때의 유포론은 양역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양역변통론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다.

[변천]
17세기 중반부터는 유포론이 재정을 변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역을 변통하기 위한 논의의 하나로 제기되었다. 1659년(효종 10) 유계는 국초의 오위제(五衛制) 취지를 살려 사족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여 양역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효종실록』 10년 2월 11일]. 이어서 1667년(현종 8)에는 박세당이 평민·천민만 부역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유포론을 주장하였다[『현종개수실록』 8년 5월 2일]. 1674년(현종 15)에는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으로 인구가 줄어 양역에 수많은 빈자리가 생기자, 비변사에서 유학(幼學) 이하의 모든 사람에게 1필씩을 부과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는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실행되지 못하였다. 현종 말년인 이 무렵부터 유포론을 대신하여 호포론(戶布論)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677년(숙종 3)부터는 본격적인 호포에 대한 찬반논쟁이 간헐적으로 이어져 균역법 시행 직전까지 계속되었다[『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참고문헌]
■ 김성우, 「조선후기 ‘한유자’층의 형성과 그 의의」, 『사총』 40·41, 1992.
■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 손병규, 「호적대장 직역란의 군역 기재와 ‘도이상’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제39집, 2001.
■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집필자] 정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