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의 군역은 본래 16세부터 60세의 양인 남자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군역이 부과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 군현별로 일정한 숫자를 분정(分定)하여 그만큼만 군역을 부과하였다. 나라에서는 필요한 군사의 수와 그 군사를 뒷받침할 보인의 숫자를 책정하여 군총을 정하고, 그 군총을 군현의 크고 작은 정도에 따라 적절히 배당하였다. 따라서 군현 안에서 출생, 또는 사망으로 양정(良丁)의 숫자가 늘고 줄더라도 군총은 변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의 군총은 대략 40만명 정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 군역을 부과할 수 있는 양정의 수는 40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전 군제[舊軍制]를 회복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호패법 등을 시행하여 군역을 부과할 양정을 찾아내고 일정액의 군총을 부과하였다. 특히 인조 초에 시행된 호패법은 호적상의 남정(男丁) 수를 103만명에서 226만명으로 늘렸다 [『인조실록』 4년 6월 5일]. 그러나 이를 통해서도 예전 군제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1648년(인조 26)에 조사한 바로는 40만명 가운데 15만명이 실제 총수였고, 나머지 25만명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원동력은 사병(私兵)이었는데, 그들이 반정 성공 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오군영을 형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전 군적(軍籍)의 수는 채워지지 않은 채 새로운 군적, 즉 오군영의 숫자만 늘어났다.
연이은 기근도 군총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670년(현종 11)부터 1672년까지, 이른바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이라고 부르는 유례없는 흉년에 기근, 전염병으로 호적의 인구는 3년 사이에 약 50만명이 줄었다. 다시 1695년(숙종 21)부터 1700년까지 진행된 을병대기근(乙丙大饑饉)으로 약 140만명이 줄었다.
[변천]
17세기 후반 자연재해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기존에 운영되었던 군총은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무분별한 군총의 증가를 막기 위해 군총에 일정한 액수를 부과하였다. 다음으로는 정해진 액수를 기준으로 정액(定額)을 넘어선 군총은 조사하여 줄였다. 군총을 일정한 숫자로 고정시킨 정책으로는 우선 1699년(숙종 25)의 기묘정액(己卯定額), 1704년(숙종 30) 이정청(釐正廳)의 갑신정액(甲申定額), 1713년(숙종 39)의 계사정액(癸巳定額), 1714년(숙종 40)의 갑오정액(甲午定額)이 있었다. 정액을 넘어선 과다한 숫자를 줄이는 조처로는 1732년(영조 8)의 임자사감(壬子査減), 1734년의 갑인사감(甲寅査減)이 있었다.
그 후 균역법 시행에 앞서 1742년(영조 18) 임술사정(壬戌査正)을 단행했다. 그 이듬해에는 『양역총수(良役摠數)』를 간행하고 전국에 배포하여 군총의 기준으로 삼았다. 1748년(영조 24) 균역법 제정을 2년 앞두고 『양역총수』를 보완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간행하였다[『영조실록』 24년 6월 20일]. 『양역실총』에 수록된 군총은 서울의 오군영, 병조·수군 등에 소속된 경안부(京案付) 양역이 약 47만4000명, 지방의 감영·병영 등에 소속된 외안부(外案付) 양역이 10만4000명으로 모두 57만8000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조선말기까지 거의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