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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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작통(五家作統)

서지사항
항목명오가작통(五家作統)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
관련어향약(鄕約), 호패법(號牌法)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공동체적 상호 부조와 통제를 시행하도록 한 제도.

[개설]
면리제(面里制)가 성립되는 17세기 말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실제로 주민에 대하여 장악력을 발휘한 것은 면 단위에 머물렀다. 그 이하의 말단 행정은 사실상 지역의 자치적인 활동에 맡겨졌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는 통호(統戶)에서 촌락·행정리(行政里)에 이르는 자율적 공동체 활동에 대하여 오가작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오가작통은 지방관청이 주도하여 다섯 호(戶)를 하나의 통(統)으로 편제한 호적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호적 장부상 리(里)마다 5호를 1통으로 편제한 것은 1675년(숙종 1)에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이 반포된 이후의 일이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제정경위 및 목적]
『경국대전』에서는 오가작통에 대하여 중앙과 지방에 5가(家)를 1통으로 하여 통에는 통주(統主)를 둔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지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을 두고 면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며, 중앙에는 방(坊)마다 관령(管領)을 둔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미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이전인 1412년(태종 12)에 저화(楮貨)의 유통과 관련해서 한성(漢城)에서 5가를 1비(比)로 하는 오가(五家) 조직 관련 기사가 등장하였다[『태종실록』 12년 6월 15일].

1428년(세종 10) 『조선왕조실록』에도 한성의 오가작통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중앙정부는 오가작통을 통해서 세금의 부과와 면제, 제사·혼인·장례·농상(農桑)의 권장과 징계 등을 수시로 행하여 인민의 도망과 이주를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세종실록』 10년 윤4월 8일]. 또 같은 해 기사에 서울 각 방의 오가인보(五家隣保)만이 아니라 지방의 각리인보(各里隣保)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언급만으로 다섯 집을 하나로 하는 자치적인 말단 조직이 실제로 운영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호적을 작성할 때 호적 장부상 리(里)마다 5호를 1통으로 편제한 것은 사실상 1675년(숙종 1) 윤휴(尹鑴)의 건의에 따라 작성된 「오가작통사목」 반포 이후였다. 그 이전까지 호적 장부에는 호마다 구성원을 기록한 호들이 나열될 뿐이었다. 1675년 직전에는 10호를 하나로 묶어 호적 장부의 호를 편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호적 장부에는 현존하는 모든 호가 등재되지 않았으며, 3년마다 호적 장부가 다시 작성될 때 통호 주소가 불규칙적으로 바뀌는 현상도 있었다. 그러므로 1675년 이전까지는 실제로 호적상의 5호를 1통으로 하는 현실적인 말단 인보(鄰保) 조직을 형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1675년 「오가작통사목」이 반포될 때까지 오가작통법은 향약(鄕約)호패법(號牌法)시행 논의와 함께 거론되었다. 향약이란 지방군현의 광범위한 자치성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호패법은 관이 개별 호구(戶口) 단위로 인민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향약에 따라 자치적으로 주민을 파악한다면 호구가 누락되는 일은 없겠지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법이 시행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염려하였다. 또한 호패법은 그 절목이 매우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엄중한 법을 정해 두지 않고서는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요컨대 오가작통은 광범위하게 자치를 인정하려는 쪽과 관이 일일이 주민을 파악하고자 하는 쪽의 절충이었다. 최소한의 자치적 상부상조에 기초하여 국가 통제가 시행되기를 기대하는 방안이었다.

[내용]
1675년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작성하여 공표한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 21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민호(民戶)는 가까운 이웃끼리 모으되 가(家) 구성원의 많고 적음과 재산의 빈부를 막론하고 다섯 집마다 1통을 만들고, 1통 안에서 한 사람을 골라서 통수(統首)로 삼는다.

2) 다섯 집이 모여 논밭을 갈고 김을 매는 일을 서로 돕게 하되, 나가고 들어올 때에 서로 지키고, 병이 있으면 서로 구호한다. 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개·닭소리가 서로 들리게 하고 부르면 서로 응답하도록 하며, 외딴집에서 떨어져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3) 다섯 집마다 1통을 만들되, 만일 혹시 남은 집이 있어 다섯에 차지 않더라도 다른 면을 넘어서 합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남은 가호만으로 통을 만들어 붙인다.

4) 1리(里)마다 5~10통은 소리(小里), 11~20통은 중리(中里), 21~30통은 대리(大里)로 한다. 리 안에서 이정(里正)을 임명하고, 유사(有司) 2명을 두어 1리의 일을 맡게 한다.

5) 통이 있고 리가 있으면 본면(本面)에 속하게 하는데, 면에는 도윤(都尹)·부윤(副尹)을 각기 한 사람씩 둔다. 큰 면에는 리가 많고 작은 면은 거느리는 리가 적은데, 각기 호의 많고 적음과 쇠잔하고 번성함에 따라서 제1리·제2리로 일컬어 3·4·5·6리에 이르게 한다.

6) 군현 가운데 향품(鄕品)은 진실로 선택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이정(里正)까지도 또 매번 서얼(庶孼)과 천류(賤類)로 임명하기 일쑤다. 수령(守令)이 골라서 정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피하고자 한다. 이 뒤로 이정과 면윤(面尹)은 반드시 모두 한 고을에서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로 정한다. 비록 일찍이 문무(文武)의 음직(蔭職)을 지낸 자라도 임명할 수 있다.

7) 통마다 1통의 민호를 나란히 적어서 혹은 한 패(牌)를 만들거나, 혹은 한 종이에 써서 아래에 기록한 바와 같이 하여 윤차(輪次)로 비교해 보는 기초 자료로 삼는다. 패식(牌式)은, ‘읍(邑)·면(面)·리(里)·통(統)·통수(統首)·호(戶)에 무슨 역(役)’이라 기록한다.

8) 그 가호(家戶)가 위치해 있는 차례에 따라 쓰되, 천인(賤人)은 한 줄을 낮추어 쓴다. 어느 호·역 밑에 각각 거느리는 남자가 몇 정(丁)인데, 아무는 무슨 직역(職役)을 맡고 있고, 아무는 아무 기예(技藝)를 업(業)으로 하며, 아무는 역(役)이 없고, 아무는 나이가 어리며, 아무는 이주해 왔다는 것을 쓴다.

9) 각 통(統)에서 패(牌)를 조사·확인하고, 또 출생·사망 여부를 기록하여 이임(里任)에게 갖추어 올리면, 이임은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매년 말에 감사에게 문서로 보고한다. 통 안에서나 리(里) 안에서 만일 내력이 불분명하고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워서 숨겨 둘 수 없는 자가 있으면 기한에 구애할 필요 없이 모두 즉시 보고해 알린다. 만약 나이를 보태고 줄이거나 패(牌) 안에 역명(役名)을 누락하거나 사실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호적 사목(戶籍事目)에 의거하여 논죄한다.

10) 통 안의 사람으로 남정(男丁) 16세 이상인 자는 또 반드시 신상호구(身上戶口)가 있으니, 어느 도(道), 어느 현읍(縣邑), 어느 면(面), 어느 리(里), 무슨 역(役), 성명(姓名), 나이가 얼마인지 등을 두꺼운 종이에 써서 이정(里正)과 리(里)의 유사(有司)가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고, 지방의 관사(官司)에서 도장을 찍어, 항상 출입할 때 주머니에 차고 다니게 한다. 이것이 없는 자는 관문(官門)에 들어가거나 송사와 재판에 나아가거나 하지 못하게 한다.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각각 소속된 관아(官衙)나 주인(主人)을 쓴다. 혹시 분실한 자는 그 사유를 갖추어 관청(官廳)에 올리고 종이 1장을 바치면 관청에서 다시 만들어 준다. 만약 본래 이를 가지지 아니한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한다.

11) 이제부터는 호적·호구 가운데에도 반드시 어느 리(里), 어느 통(統), 제 몇 호를 호구단자(戶口單子) 첫 줄에 써서, 참고하고 조사하는 데 편리하도록 한다.

12) 유민(流民)의 무리로서 각각 장인(匠人)을 업(業)으로 삼는 자들이 있다. 산골에는 철물이나 연자매를 만드는 수철장(水鐵匠)·마조장(磨造匠)이 있고, 강이나 연못에는 유기(柳器) 등을 만드는 고리장이 있다. 모두 이주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머무는 데에 기한이 없다. 그러나 이미 남녀의 가구(家口)를 갖추었으므로, 또한 여러 사람을 따라 통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원래 사는 가까운 통으로 ‘주통(主統)’을 삼게 하여 항상 참조하고 조사하도록 한다. 통패(統牌)에도 또한 본래의 통패 끝에 어느 지방에서 옮겨 와서 몇 해를 살고 남녀가 몇 구(口)인가를 적도록 한다.

13) 무릇 성명을 통패에 기재하지 않은 자는 곧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들어 있지 아니한 사람이므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살해당하여도 그 살인자를 처벌할 수 없다.

14) 무릇 통리(統里)의 백성은 서로 보호하고 서로 살펴서 혼인과 상사(喪事)에 서로 돕고 환난에 서로 구휼하며, 착한 일은 서로 권면하고 악한 일은 서로 경계하며, 송사를 그치고 다툼을 없애며, 신의(信義)를 강구하고 화목(和睦)을 닦아서 선량한 백성이 되도록 힘쓴다. 만약 불효하고 형제간에 불화하거나, 주인을 배반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풍속을 손상하고 도적이 되는 등의 일은 반드시 리와 면에 고하고 본현(本縣)에 알려서 경중(輕重)에 따라 징계하고 다스리는 바탕을 삼게 한다.

15) 통 안에 만약 간사하고 거짓되며 도둑질을 하는 무리와 내력이 불분명한 사람이 있으면, 또한 즉시 고발하게 한다. 만약 보고를 빠뜨리거나 속이고 숨겼다가, 마침내 일이 발각되면 통임(統任)이 다시 밝혀서 통(統) 안에서 관련자를 찾아서 죄를 묻는다. 만약 본통(本統)에 관계된 것을 먼저 보고해 알렸는데, 리(里) 안에서 사실을 가리어 숨긴 채 고발하지 아니한 자는 모두 처벌한다.

16) 역(役)을 피한 백성이 옮겨 오거나 옮겨 가며 그 거주(居住)를 정하지 않아서 지금 큰 해가 되었다. 통법(統法)을 세운 후에는 다른 고을로 옮겨 가는 백성이 반드시 무슨 일로 인하여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갖추어 보고하면, 통에서 리(里)에 보고하고, 리에서는 관청에 보고하여, 옮겨 가도록 허락한 뒤에야 비로소 가게 한다. 새로 옮긴 지방에서도 예전에 살던 관에서 옮기도록 허락한 문서를 본 후에야 비로소 머물러 살도록 용납한다. 이 문서가 없는 자는 곧 간악한 자와 관계되니, 법에 의해 가두어 그 죄를 추궁하여 심문한다. 그것으로 구분하여 편안히 사는 바탕으로 삼는다. 마땅히 이주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자를 받아들이면 처벌한다.

17)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고 세금 납부를 독려하며 경계(境界)를 바르게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통리(統里)에 책임을 지워야 한다. 같은 마을 백성은 힘써서 화목과 믿음을 돈독하게 하여 농사를 함께 지으며, 심고 매는 것을 함께하며, 호미를 서로 빌려 주고 소를 빌려서 서로 돕도록 한다. 명령한 바와 같이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처벌한다.

18) 무릇 리(里) 가운데 고랑을 치고 방죽을 수축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만드는 것은 작으면 한 리(里)의 힘을 합하고, 크면 한 면(面)의 힘을 합하여 때가 지나지 않도록 한다. 거부하는 자는 명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

19) 무릇 한 면(面) 가운데 반드시 넓은 장소나 혹은 정자(亭子)나 사찰(寺刹)에 여러 사람을 모을 만한 곳을 골라서 봄·가을에 서로 모여서 신의(信義)를 다진다. 또 존비(尊卑)의 등급을 나누어 부형(父兄)이 된 자는 같은 리의 자제를 훈계하여 타이르고, 자제가 된 자는 같은 리의 부형을 공경하며 그들에게 순종한다. 문학(文學)을 학습한 자는 혹은 글을 짓고, 무예(武藝)를 학습한 자는 또한 궁마(弓馬)를 시험하여 본현(本縣)에 보고하면 그 재예(才藝)를 살펴서 포상(褒賞)한다.

20) 사(社)에 창(倉)이 있는 것은 옛 제도이다. 각 리와 각 통에서 만약 각기 조력하여 재물과 곡식을 한 면 가운데에 합해 모을 수 있다면, 본읍(本邑)에서도 힘에 따라 이를 도와서 상평(常平)의 제도를 행하게 한다. 혹은 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기도 하면서 환곡을 출납하여 이식을 늘리고 이것으로 흉년에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

21) 면윤(面尹)은 이정(里正)을 통솔하고 이정은 통수(統首)를 통솔하되, 각각 3년을 맡고 바꾼다. 그 가운데 면윤으로서 능력이 있는 자를 추천하여 아뢰어서 논상(論賞)한다.

[참고문헌]
■ 『거관대요(居官大要)』
■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
■ 권내현, 「숙종대 지방통치론의 전개와 정책 운영」, 『역사와 현실』 25, 1997.
■ 오영교, 「조선 후기 오가작통제의 구조와 전개」, 『동방학지』 73, 1991.

■ [집필자] 손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