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사전(私田)은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소유권이 있는 토지 혹은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토지를 지칭하였다. 이러한 사전 개념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조선에서도 소유권·수조권에 대한 이중적인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국가 소유지에 대비되는 개인의 소유지라는 의미의 용어로 민전(民田)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일반 개인의 소유’라는 의미를 강조할 때에 종종 사전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반면 수조권을 기준으로 할 때는 민간의 소유주가 있는 토지 위에 설정된 개인 수조지를 일컫는 용어로서 과전(科田)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조선의 경우 관원 개인에게 수조권을 분급하는 것은 명종대에 철폐되었으므로, 이후에 사용되는 사전은 주로 개인 소유지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고려말 문란하였던 사전을 모두 혁파하고 동시에 과전법(科田法)을 도입하였다[『태조실록』 총서 96번째기사]. 이 당시 혁파된 사전은 관원이 개인적인 수조권을 행사하던 토지였다. 사전 혁파 이후 과전법을 통해 관원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제도화한 것에서도 이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조선초의 사전은 주로 개인에게 수조권이 분급된 토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과전 대신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지급된 직전(職田), 공신들에게 지급된 공신전(功臣田), 기타 특정 역(役)에 대한 면세지 등은 모두 사전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반면 수조권이 국가나 중앙·지방 관서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는 모두 공전(公田)의 범주에 해당하였다.
명종대에 이르면 관료들에게 더 이상 직전을 분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조권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사전의 범주도 매우 축소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자료에도 사전의 존재는 광범위하게 확인되는데, 이런 경우 사전은 민전의 의미와 같은 일반민이 소유권을 행사하는 토지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진주(晋州)의 흥선도(興善島), 고성(固城)의 해평장(海平場), 동래(東萊)의 오해야(吾海也) 등지의 목장은 목장 안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전이라 일컬으면서 호조(戶曹)에 세금을 납부했다고 한다[『인조실록』 8년 2월 13일]. 이는 사전을 소유권에 의해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우였다. 호조에 전세를 납부하는 것은 수조권적 기준에 의하면 공전이지만, 위의 자료에서는 사전이라고 칭하였다. 국가 소유의 토지를 일반 백성들이 사유화하고 이를 경작하여 여타의 전결에서처럼 전세를 납부하는 것을 사전이라 지칭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사전이 주로 개인 소유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공전이란 용어도 국가 소유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조선후기 궁방전(宮房田)이나 둔전(屯田) 등이 증가하면서 궁방 혹은 군문·아문에 의한 토지 소유가 증가하였다. 이를 공전이라 지칭하는 용례가 자주 등장하였다.
[변천]
공전과 사전의 개념은 본래 소유권과 수조권을 기준으로 하여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조선전기에는 수조권을 기준으로, 조선후기에는 소유권을 기준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16세기 중반 국가에서 수조권을 개인에게 분급하는 것이 사실상 소멸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 일조각,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