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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용전제(國用田制)

서지사항
항목명국용전제(國用田制)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재정(財政)
하위어국용전(國用田)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위전으로 분산되어 있던 전세 재원을 1445년(세종 27) 국용전으로 통합한 재정 운영 방안.

[개설]
국용전제(國用田制)는 세종대 공법(貢法)이 원래 정액제로 출발하였다가 정률제로 귀착됨에 따라 마련된 재정 운영 방안이었다. 1428년(세종 10) 시작된 공법 개정은 정액세를 관철시킴으로써 안정된 세수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세종실록』 10년 1월 16일]. 그러나 1444년(세종 26) 공법은 6등 전품(田品)에 9등 연분(年分)을 수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이처럼 공법이 당초 의도와는 달리 정률세로 귀결됨으로써 안정된 세곡의 징수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용도에 따라 각종 명목의 위전을 분급하고 세액은 답험에 의해 결정하던, 기존의 위전제(位田制)에 입각한 재정 운영 방식을 포기하였다.

위전제는 각사(各司)가 지정된 토지에서 그 토지에 대한 답험 결과를 수용하여, 통보된 액수만을 해당 군현에서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국용전제 시행 이후에는 모든 토지가 국용전으로 일괄 편입되었다. 따라서 해당 군현이 징수한 전체 세곡 중에서 각사의 몫으로 정해진 양은 상납하고, 나머지는 잔류시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방식은 전체 세입이 국용(國用)의 총량을 밑돌지 않는 한 재정 운영 자원을 확보하는 데에 한층 안정된 방법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 조선전기 답험손실법과 위전제

조선시대 전제(田制)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전(量田)에서부터 과세 및 수납, 재원의 분정 방식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양전은 재원을 파악하는 과정이고, 분전(分田)은 파악한 재원을 나누는 과정이었다. 과세 및 수납은 대상지에 대한 과세액을 대상자에게 고지하고 수납하는 일체의 과정을 말하였다.

1428년(세종 10) 새로운 공법안이 제기되기 이전의 양전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서로 다른 상·중·하 3등전으로 구분하고, 결부(結負) 단위로 양전하여 자정(子丁) 별로 양안에 등재하였다. 파악된 전지를 재정 수요가 있는 곳에 분급하여 재원으로 삼았는데, 분속된 전지를 위전이라고 하였다. 각사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면 각사위전(各司位田)이라 하고, 잡물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면 잡물위전(雜物位田), 수령의 봉록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면 아록위전(衙祿位田) 등이라 하였다. 위전은 조선초기 정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필수적인 재원이었다. 이에 모든 토지에 조세가 부과되었으며, 경작자의 분속처가 어디인가에 따라 최종 수납처가 달랐다.

세액은 동일한 1결에 동일한 과세를 부담한다는 원칙하에 1결당 30두(斗)를 상한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최종 과세액은 답험(踏驗)에 의해 정해졌다. 해마다의 작황을 살펴보고 전조(田租)를 일정한 비율로 감해 주는 방식, 즉 ‘1분(分)의 실(實)에 대해서도 1분의 조(租)를 징수하고 1분의 손(損)에 대해서도 1분의 조를 감하는’ 취지의 세법이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었다.

답험은 다른 지역 출신의 위관(委官)이 파견되어 업무를 감독하고 해당 지역의 향리·서원 등이 경작지의 작황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는 수령과 관찰사를 통해 중앙에 보고되었고, 때에 따라 경차관이 파견되어 군현 단위 답험을 감독하였다. 위전의 경우 수조권자인 각사에게는 답험권이 없었다. 고려말 각 경작지의 수조권자가 직접 경작자에게 조세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직접 징수하는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각사에서는 공적 조직에 의한 답험 결과를 수용하여 통보된 액수만을 해당 군현에서 징수하였다. 현지에 가서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구축한 유통망을 통해 올라온 세곡을 해당 군현의 공리(貢吏)에게서 징수하였다. 즉 조선의 전세수납제도는 수조권과 납세자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면 배제시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답험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손실을 인정해 주었으므로 세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답험실무자의 재량권이 커서 손실의 규모가 증대되고 농간을 부릴 여지가 항상 존재하였다. 답험법이 적용되어 목표액이 미달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보충하는 조처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답험제의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 재정 운영상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1428년(세종 10) 정액세인 공법이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2. 공법 제정 과정과 국용전제로의 변화

세종대의 공법은 단순히 전세법의 개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전에서 재정 운영의 방식 전반에 걸친 개혁안이었다. 1428년(세종 10)부터의 양전은 답험제 수세(收稅)의 바탕이 되는 마지막 양전이자 초기 공법 운영의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양전에서도 경작되지 않는 토지가 원전(元田)으로 파악되었고, 이로써 답험법 아래에서 남는 곡식을 빌려다 쓰는 전청(傳請)이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기할 수 없게 되자 이를 타개할 방책으로 모색된 것이 공법이었다. 공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는 세액을 낮추는 대신, 파악된 모든 토지에 대해 세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부과 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1437년(세종 19) 반포 법안과 1440년(세종 22)의 수정안이었다. 1437년 공법에서는 상·중·하전에 대해 동일한 1결에는 동일한 세액을 부담한다는 원칙이 포기되었으며, 하삼도 지역과 기타 지역 사이에도 세액을 차등화하였다. 1440년 법안에서는 도내의 군현 단위로 전품을 달리 설정하면서, 상·중전과 하전으로 지품(地品)을 나누어 차등수세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종전에는상·중·하전 각 1결은 면적은 다르지만 동일한 세액을 부담하였는데, 이제는 상·중전에는 동일한 세액을 부담하지만 하전에서는 이보다 낮은 조세를 부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토지의 소재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다른 세액이 부과되었다.

양전제의 이러한 변화는 전국적으로 분포한 위전의 운영, 즉 재정 운영의 방식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100결의 위전은 지역이나 지품에 관계없이 동일한 가치를 지녔는데, 이제는 지품과 소재지에 따라서 지니는 재정적 가치가 달라졌다. 경기도의 경우는 과전이 지급되는 곳이었다. 경기 군현별로 과세액이 달라진다는 것은 과전의 지급 상황을 전면 재조정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1444년(세종 26) 공법에서 지역에 따른 차등과세 방안은 그래서 배제되었다. 어느 등급의 토지라도 동일한 1결은 동일한 과세 대상지가 되도록 하는 동과수조(同科收租)의 원칙을 지키기로 하였다. 위전을 중심으로 재정이 운영되는 상황에서도 동과수조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품을 세분화하는 방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결국 공법은 전국을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파악하는 전분 6등과 해마다의 작황을 9등으로 판정하는 연분 9등제를 골자로 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결의 면적은 각 전품별로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세액은 전품에 구분 없이 상상년에 20두를 정점으로 2두씩 체감하여 하하년 4두에 이르기까지 9종으로 결정되었다. 연분 상정 방식은 군현단위로 함으로써 정실에 따른 부정의 개입 여지를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이로써 공법을 도입하려던 본래 의도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공법 개정의 발상은 정액제를 관철함으로써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친 검토 과정을 거쳐 확정된 세법에는 9등 연분이라는 작황 판단 기준이 더해지게 되었다. 출발할 때의 목적과는 달리 정률세제로 귀착된 것이다. 연분이 도입됨으로써 여전히 세수의 불안정성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6등 전품제를 시행함으로써 재정 운영의 토대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전품의 분등 방식이 바뀌었고 결의 파악 방식이 변하였으므로 기존의 일정한 결수에 해당되었던 위전은 소수점 아래의 단위로 계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원칙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위전은 본래 주어진 위치에 원래의 면적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국용전제는 이러한 재정 운영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1445년(세종 27) 그 제도가 마련되었다.

[내용]
국용전제는 1444년(세종 26)의 공법이 정액세가 아닌 정률세화 됨으로써 답험법과 동일하게 세수의 안정을 꾀하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에서 시행되었다. 정부는 국용전제 밑에 세원을 통합하여 전체 세수(稅收)가 세출보다 많게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기존의 위전은 다섯 유형으로 정비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첫째, 각사위전과 군자전, 광흥창 위전을 통합하여 국용전으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둘째, 경기전, 사직·문선왕, 사전소재(祀典所在) 악·해·독·성황 등 각종 제사의 경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위전을 지급하는 일은 폐지하기로 하였다. 대신 국고에서 필요한 경비를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셋째, 인리위전(人吏位田)을 비롯한 각종의 특수한 역 부담자에게 지급되던 위전은 폐지하기로 하였다. 넷째, 역에 지급되었던 위전은 부수적인 문제들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조정을 보류하였다. 다섯째, 아록전을 비롯하여 기타 존속시키기로 한 일부 위전들은 규모가 조정되었다. 다음은 국용전제에서 위전이 조정된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변천]
국용전제의 원칙이 실효성을 얻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9등 연분에 따라 서울의 각사와 지방의 전세 공안(貢案)이 다시 작성되어야 했고, 양전과 6등 전품 판정이 있어야 세액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용전제가 상납항수(上納恒數)를 정하는 것이었으므로 합리적인 항수를 상정하는 것도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세조대 횡간(橫看)의 책정 노력은 합리적인 항수를 도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때 재정 정비를 전담한 부서는 상정소(詳定所)였다.

횡간은 서울과 지방 모든 관서의 재정 비용을 정리한 문서로 국용전제의 원칙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에 횡간의 책정과 교정 작업은 세조가 직접 관장하다시피 하였으며 1467년(세조 13) 일단락되었다[『세조실록』 13년 11월 12일]. 세조대의 횡간은 성종대에 대대적인 정비 과정을 거치면서 전반적인 지출 경비가 예측될 수 있었고, 지출을 염두에 두면서 세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향후 세법의 운영에서 연분이 하년(下年)으로 판정되면서 전세 징수액을 축소해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총 지출 비용을 예측할 수 있는 횡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법의 세수 운영은 답험법과는 크게 달랐다. 답험법에 의해 세수가 결정될 때에는 작황과 그에 근거한 세수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재정 부족분을 메워 줄 일정 규모의 국고곡(國庫穀)을 유지하는 것이 재정 운영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공법이 도입되고 세수가 국용전으로 통합되어 운영되면서 전체적인 지출 규모가 횡간을 통해 파악되었다. 이로써 재정 운영의 예측성이 그만큼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종대에도 국고곡은 여전히 방대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재정 운영상의 긴요함은 답험법 세수가 적용될 때보다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강제훈, 『조선초기 전세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김태영,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 이장우, 『조선초기 전세제도와 국가재정』, 일조각, 1998.
■ 오정섭, 「고려 말·조선 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 재정」, 『한국사론』 27, 1992.
■ 이혜정, 「조선 초기 재정 운영 방식과 국용전제」, 『경희사학』 21, 1997.

■ [집필자] 이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