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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가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노동력을 백성들에게 강제 부과하여 충당하던 방법, 혹은 개별 인민들에게 부과하던 다양한 역의 총칭.
[개설]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전통 시대의 국가에서는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역을 백성들에게 강제로 부과하였다. 이러한 강제적인 인력 동원이 제도화된 것이 바로 역(役)이다. 역의 종류는 항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국역(國役)으로 후자는 요역(徭役)·잡역(雜役)으로 불리었다. 인민들이 국가에 대해 항상 복무하는 국역은 직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무자의 입장에서 특정 국역들을 직역(職役)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신분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국역의 수행은 어떤 직무에 직접 복무하는 방식과 특정 물자를 생산하여 납부하는 방식, 혹은 직무 수행 대신 포(布) 등의 세금을 바치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국역은 국가의 재정 운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고용 노동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런 경향이 국가 운영에도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국역의 의미가 차츰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역에 의한 통치 체제가 명목상 퇴색하였다고 하더라도, 국역은 세금의 일부로 전환되어 국가 재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부분의 조선시대 인민들은 일정 연령 이상이 되면 특정한 노동에 복무하도록, 즉 국역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예컨대 양반들이 관직에 나아가 관원이 되는 것도 다양한 국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는 양반 중에서도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소수의 관직 진출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양반들은 일반 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군역 등을 통해 국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양반들을 위해 국가에서는 특별한 병종(兵種)을 편성하여 이들의 군역 부담을 완화해 주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양인은 군역의 형태로 국역에 종사하였다. 군역의 대부분은 양인들에게 부과되는 병종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역을 양역(良役)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양인들의 군역은 전체 국역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16세 이상의 양인 남정(男丁)은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지녔다. 직접 군인이 되어 서울이나 지방에서 복무하기도 하였고, 혹은 봉족(奉足)으로 편성되어 군역을 직접 지는 자들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정병(正兵) 등으로 편성되더라도 직접 복무하는 대신 일정량의 포(布)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방에서 수령을 보좌했던 향리역(鄕吏役) 역시 국역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에는 향리들이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향리 자신과 자제들의 과거 응시 기회를 박탈하여, 세 아들 중 한 명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향리역을 충당해야 할 자들의 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동시에 향리들의 사회적 진출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편 국가에 필요한 특정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소금 생산을 위한 염간(鹽干), 철 생산을 위한 철간(鐵干), 진상용 생선을 잡는 생선간(生鮮干)[『세종실록』 29년 9월 19일], 얼음을 관리·보관하는 빙부(氷夫) 등 그 종류는 무척 다양하였다. 이러한 특정 물품을 조달하는 역은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태종실록』 13년 8월 30일]. 신량역천이란 법제적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이 역시 해당 역 부담자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변천]
인민에게 다양한 역을 부과하던 국가의 통치 방식은 17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6세기부터 직접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포를 대신 납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것이 17세기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결국 정부에서도 군역을 포로 대신 납부하는 방식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로 국역은 노동력의 직접 부담보다는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군역, 즉 양역이 대표적인 경우로서 이들이 납부하는 포는 조선후기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역으로 부과되는 포는 인민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대에는 양인층이 국역으로 부담하는 포를 반으로 줄여 균일하게 1필로 규정하는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국가가 인민들을 직접 동원하여 이들을 각종 역으로 편성한 국역은 조선의 대민 지배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역의 성격 변화는 사회에 조응하여 변화하는 국가 운영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또한 국역 부담이 포납(布納)으로 바뀐 이후,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 역시 조선후기 재정 운영의 특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성우,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 김석형, 「이조 초기 국역 편성의 기저」, 『진단학보』 14,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