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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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토작공(任土作貢)

서지사항
항목명임토작공(任土作貢)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공납(貢納)
하위어공물(貢物)
관련어대납(代納), 방납(防納)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그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이어야 한다는 공물 부과 원칙.

[개설]
임토작공은 우(禹)임금이 천하를 9주로 나누어 그 지방에서 나는 물산을 거두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의 원칙에 따라 그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공(厥貢)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물품 중 전라·경상·황해도에는 과실류가, 충청·강원·황해도에는 목재가, 전라·경상도에는 해산물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이 분정되었다. 당시 각 지역의 대표적인 공물은 충청·전라·경상도의 면포(綿布), 평안·황해도의 명주, 함경·강원도의 상포(常布), 양계 지방의 담비 가죽[貂鼠皮], 강원도의 목재, 황해도의 철물(鐵物), 전주·남원의 두꺼운 종이[厚紙], 임천·한산 등지의 생모시[生苧], 안동의 돗자리[席子], 제주도의 말 등이 있었다.

[내용]
공물은 임토작공의 원칙에 따라 분정되었기 때문에 특산물이 중앙에 일단 보고되면 군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그 지방에서 어떤 특산물이 나더라도 해마다 공물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이처럼 특산물이 나는 지역은 중앙 권력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수탈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감귤은 종묘의 천신(薦新)과 빈객(賓客)의 접대에 긴요하게 쓰였는데, 감귤이 특산물인 지역 관부(官府)의 과원(菓園)에서 재배하여 상납하였다. 그런데 관부에서 재배를 잘못하고 찬바람이 불어 예전에 심은 것이 거의 없어지면 이를 민가에게서 수취하였다. 그리고 민가의 감귤이 겨우 열매가 맺으면 개수를 헤아려 표지를 달았는데, 후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벌금을 징수하였고, 기한 안에 관부에 도착하지 않으면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귤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았고, 심한 경우에는 뽑아 버리기까지 하였다.

또한 함경도에서 금이 나는 지역[産金地]으로 화주·안변·단천이 있었는데, 1421년(세종 3) 봄가을에 걸쳐 화주에 80냥, 안변에 66냥, 단천에 54냥이 배정되었다[『세종실록』 3년 1월 19일]. 그에 따라 그 지역 백성은 봄·가을에 각각 40일씩 역(役)을 져야 했다. 그 노역은 몹시 괴로웠지만 채금액은 적어 “1년 동안 금을 채취하는 고통이 10년 동안 공물을 준비하는 것보다 갑절이나 고되다.”는 말이 나왔다[『세종실록』 7년 8월 28일]. 1430년 백성이 역으로 일하는 기간은 풍년일 때 30일, 평년일 때 20일, 흉년일 때 각각 10일로 규정되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안변 등지의 연간 80일 채금역은 매우 과중한 것이었다.

[변천]
1450년(문종 즉위) 10월 의정부의 논의에 의하면, “봉밀(蜂蜜)이 강원도에서 난다고 하여 다른 도에는 정하지 않고 모두 강원도에만 분정한다면 강원도에서는 반드시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용궁·예천에서 돗자리[席子]를 생산하는데 모두 이곳에 분정한다면 또한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물산이 이와 같으니 나는 것만을 가지고 정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만 공물을 분정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으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도 분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원래 그 지방에서 났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양이 줄거나 더 이상 나지 않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대에는 담비 가죽을 6진에 많이 분정하였는데, 이곳 백성들은 담비 가죽을 구할 길이 없어 으레 소[牛隻]를 가지고 야인과 무역하여 납부하였다. 야인은 조선인들이 담비 가죽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항상 준비하였고 매매할 때 그 값으로 소와 말[牛馬], 철물(鐵物)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말 혹은 소 1마리와 담비 가죽 1장을 바꾸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철물, 소와 말, 군기물(軍器物)을 몰래 파는 행위[潛賣]를 강하게 금지하여 그 규정을 어기면 사형[罪死]에 처한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변방 고을의 수령조차 철물을 가지고 야인과 무역하였다. 공물은 일단 공안에 등재되면 나던 나지 않던 납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공안을 상정할 때에는 그 군현이 번성한 정도, 경작지의 크기를 고려하고 물산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도 헤아려 공물을 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 군현마다 물산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를 분별해서 공물을 골고루 분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소유한 경작지[所耕田]의 크기에 따라 쌀과 포(布)를 거두는 방식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납부해야 하는 공물의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소유물을 팔아서 물품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공납제 운영 원리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각 군현의 전결 수를 헤아려 분정된 공물의 종류·물량에 따라 그 가격을 결정하는 사대동(私大同)·대동제역(大同除役) 등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수취 부담이 백성에게 가중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공물가 징수의 확대·정착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의 내용과 그 성격」, 『인문학연구』 1, 1998.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집필자] 박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