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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곡물을 무상으로 지급하여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곡물이 필요하였다. 15세기에는 의창곡을 활용하여 흉년에 무상분급을 하였고[『세종실록』 28년 2월 29일],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되자 민간 보유 곡물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상평청·진휼청 환곡을 운영하여 필요한 곡물을 확보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12월 4일].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 이전할 창고곡을 확보하는 등 흉년에 대비한 비축 곡물은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흉년에 무상분급을 시행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집중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진휼정책을 자주 시행하였고 이 영향으로 진휼을 위한 비축 곡물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184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왕조의 진휼정책은 위축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흉년이 들었을 때 피해를 입은 농민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거나 환곡을 통하여 식량과 종자를 지급하는 것 역시 진휼정책에 속하였다. 그러나 환곡은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환곡을 갚을 능력이 없는 빈곤층에게는 무상으로 죽을 지급하거나, 곡식을 지급해야만 그들이 굶어 죽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무상분급에 소비되는 재원을 진자(賑資)라고 하였다[『숙종실록』 6년 12월 15일]. 진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곡식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항상 충분한 곡식을 비축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흉년에 진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공물의 징수를 정지하고, 그 공물을 쌀로 바꾸어 진자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공명첩을 발급하여 곡식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또한 감영이나 지방 군영에 보관되어 있는 군포(軍布) 등도 진휼의 재원, 즉 진자로 사용되었다.
[내용]
조선초기에 농민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의창곡은 무이자로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회수하는 환곡(還穀)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곡물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흉년에 대비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평상시에는 여러 진(鎭)의 당번 수군(水軍)에게 소금을 굽고 미역을 채취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8년 12월 24일].
의창곡은 환곡의 방식으로 운영될 때 이자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난한 농민들은 흉년이 들지 않았을 때조차 환곡을 갚는 것이 쉽지 않았고, 흉년에는 더욱 어려워 납부하지 못한 곡물이 많았다. 의창곡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자곡(軍資穀)을 의창에 옮겨 보충하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이에 1461년(세조 7)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의창을 대체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창도 징수가 원활하지 못하여 결국은 1470년(성종 1)에 폐지되었다[『성종실록』 1년 2월 24일]. 사창의 설립을 계기로 의창은 별창(別倉)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후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의창곡의 축소는 흉년에 사용할 수 있는 진자가 축소된 것을 의미하였다.
[변천]
16세기에는 환곡으로 분급되는 군자곡과, 의창곡에서 명칭이 바뀐 별창곡(別倉穀)이 감소되거나 부실해져 새로운 진휼 재원을 찾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앙에 납부해야 할 전세 상납곡, 공물 여유분, 노비 신공(身貢), 어염 선세 등과 같은 자원을 고을에 유치하여 두고 사용하였는데 그것을 진휼 재원으로 전용(轉用)하였다. 또한 민간 보유 곡물을 진휼 재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국가 보유 곡물이 부족하자 흉년이 들면 지방관은 부민(富民)들이 보유하고 있는 곡식의 수량을 파악한 뒤에, 그 식구들이 먹을 만큼의 곡식을 제외하고는 창고를 폐쇄하여 곡식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구제가 시작될 때 파견된 관리가 창고를 열고 기민(飢民)에게 곡식을 분급하였고, 가을에 공채(公債)의 규례에 따라 수령이 징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러한 조처를 ‘관봉(官封)’이라고 하는데, 부민들에게 곡식이 제대로 상환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긴급한 재정 수요가 발생하였을 때 부민에게 곡물을 출연하도록 하고 반대급부로 관작(官爵)을 제수하는 ‘납속보관(納粟補官)’이 제시되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17세기 후반에는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진휼사업에서 진자로 사용된 항목은 18세기에 비하여 다양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 각 지역에서 사용한 진자의 내역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강화와 남한산성에 비축한 곡물을 주로 사용하였다. 삼남 지역에서는 통영곡을, 평안도에서는 관향곡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공명첩(空名帖)을 발급하여 진자에 보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통영곡·관향곡 등 이들 곡물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재정 부족의 상황 속에서 정부는 당장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1650년(효종 1)에 호조(戶曹) 환곡의 모곡(耗穀) 3/10을 상평청에 이관하는(옮겨 관할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에 따라 상평청 환곡이 등장하였다. 상평청 환곡은 본래 경기도의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설정되었다. 하지만 그 환곡의 범위가 전국에 걸쳐 존재하였고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흉년에 통영곡·관향곡 등의 곡물과 함께 진자로 이용되었다. 상평청의 설치 목적이 본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군향의 비축 목적과는 달리 상평청 환곡은 전국 규모의 진자에 사용할 수 있었다.
현종 연간에는 기근이 빈번하여 진휼청이 상설화되었다. 그에 따라 진휼청도 환곡을 운영하게 되면서 흉년을 대비한 비축 곡물의 양이 증가하였다. 이외에 감영에서 운영하는 별회미(別會米) 등도 진자로 사용되었다. 이는 지방에서 자체로 마련한 재원으로 정부의 중앙 재정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18세기 전반에도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하여 새로운 환곡이 다수 설치되었다. 군포(軍布) 납부 대상자에게서 군포 대신 쌀을 징수하여 곡물을 비축한 군작미(軍作米)가 창설되었다. 진휼사업에서 상평청·진휼청 곡물이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빈번해지자 1770년(영조 46)에는 두 기관의 곡물을 공식적으로 상진곡(常賑穀)으로 통합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창고곡을 설치하였다. 제주도로 이전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나리포창(羅里舖倉)을, 함경도로 곡물을 이전하기 위하여 경상도 연일(延日)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하였다. 이외에도 삼남 지역에 제민창(濟民倉)을 설치하였다.
국가의 비축 곡물이 증가하면서 흉년이 들었을 때에 진휼사업이 활발히 시행되었다. 재해가 들었을 때 기민의 수와 무상으로 분급한 곡물 액수를 정부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때는 1756년(영조 32)이었다. 이때부터 1863년(철종 14)까지 108년에 걸쳐 54회의 진휼사업이 시행되었다. 즉, 평균 2년에 1회꼴로 진휼사업이 시행되었다. 정조 연간에 연인원 1,000,000명 이상의 기민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한 사례를 살펴보면, 1782년(정조 6) 1,440,000명, 1783년 1,590,000명, 1784년 4,110,000명, 1787년 3,550,000명, 1790년 1,560,000명, 1793년 4,590,000명, 1795년 5,580,000명, 1798년 1,330,000명, 1799년 1,620,000명 이상이었다. 당시에 진자로 소비된 곡물은 수만 석에서 수십만 석이었다. 이때 사용된 곡물은 상진곡 등 진휼용 환곡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공명첩을 발급하여 확보한 곡물, 지방관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자비곡(自備穀), 부민이 납부한 원납곡 등도 포함되었다.
19세기 초반의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진휼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환곡의 원액은 크게 감축하였다. 1809년부터 1815년까지 7년간 각 지역에서 진휼사업이 계속 시행되었다. 7년간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한 기민의 연인원은 1810년 8,400,000명, 1811년 830,000명, 1812년 2,080,000명, 1813년 2,490,000명, 1814년 790,000명, 1815년 5,530,000명 이상이었다.
1810년의 경우 연인원 8,400,000명의 기민에게 진휼사업을 시행하였다. 그중에서 전라도의 기민이 4,760,000명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250,000여 석의 곡물이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기근이 발생하여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면서 상진곡 등의 환곡은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흉년은 계속되었다. 특히 1832~1838년에 집중적인 흉년이 발생하여 1833년 2,650,000명, 1834년 1,720,000명, 1837년 1,110,000명, 1839년 880,000명, 1840년 1,160,000명 이상의 기민에게 식량을 지급하였다.
19세기 전반의 집중적인 기근과 진휼정책의 시행으로 비축되었던 곡물이 감소하면서 조선왕조의 진휼사업은 1840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하였다. 첫째, 1840년 이전에는 100,000석 이상을 무상분급으로 사용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났지만 1840년 이후에는 단 한 차례만 100,000석 이상의 진휼곡을 사용하였다. 둘째, 이전에는 해당 도의 곡물뿐만 아니라 다른 도의 곡물을 옮겨 와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나타났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다른 지역의 곡식을 활용하는 사례가 현저히 줄었고 그 액수도 적은 양에 불과하였다. 이와 함께 중앙에 올려 보내야 할 몫을 진휼 재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중앙 상납분을 진자로 활용하는 것은 눈앞의 기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중앙의 각 기관은 새로운 경비 부족의 문제를 안게 되었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정형지, 「숙종대 진휼 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 정형지, 「조선 후기 진급(賑給) 운영에 대하여」, 『이대사원』 26, 1992.
■ 조규환, 「16세기 환곡 운영과 진자(賑資) 조달 방식의 변화」, 『한국사론』 37, 1997.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