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흉년이 들었을 때에 무상으로 곡물을 나누어 준 사람들에 대한 기준은 16세기 명종대에 처음 나타났다. 이때 기민(飢民)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이름을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이 기준이 조금 더 세분화되어서 재산과 생활수준에 따라 무상으로 곡식을 받을 사람을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1·2·3등급으로 구분하여 시차를 두고 곡식을 지급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왕조에서는 흉년이 들었을 때 환곡의 지급을 확대하거나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여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환곡은 갚아야 하는 것인 데 비하여 진제곡(賑濟穀)은 갚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무상으로 지급하는 진제곡을 받기 원하였다. 흉년이 발생하였을 경우 지방관의 중요한 임무가 굶주린 기민을 정확히 선발하는 것이었다.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할 인원을 선발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진휼에 필요한 곡물의 양을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내용]
조선건국 이후 의창(義倉)을 통하여 환곡을 분급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곡물이나 죽을 지급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흉년 시에 모두가 곡물의 무상지급을 바라지만 한정된 곡물로는 제한된 인원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방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16세기 명종대에도 각 마을의 극심한 기민에 대하여 등급을 나누어 이름을 기록한 책자를 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독신 여성이나 늙고 병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따로 진휼하고자 명단을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이런 규정이 좀더 정밀해졌다. 환곡을 받는 사람을 환민(還民)으로, 무상으로 곡식을 받는 사람을 진민(賑民)으로 구분하였다. 진민의 명단이 바로 진안(賑案)이었다[『정조실록』 14년 2월 2일]. 환민과 진민은 기본적으로 토지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기민 중에는 토지가 없어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 구분은 가좌성책(家坐成冊)에 나타난 생활 정도에 따라 구분하였다.
1762년(영조 38) 충청도 예산 지역의 기록에 따르면 양반·상한(常漢)을 논하지 않고 백성을 5단계로 구분하였다. 본래 가계가 넉넉한 자는 초실(稍實), 토지가 있거나 혹 타인의 전답을 병작(竝作)하여 금년에 모내기를 한 자는 작농(作農), 비록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수공업 혹은 상업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자활(自活)로 기록하였다. 또한 지극히 빈궁(貧窮)하여 아침에 저녁을 도모하지 못하는 자는 빈궁(貧窮), 표주박을 쥐고 떠돌며 구걸하는 자는 개걸(丐乞)로 기록하였다.
이렇게 먼저 진휼 대상이 되는 기민의 생활 능력과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다음, 다시 환곡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상(上)’으로 하고, 환곡을 받아야 살아갈 자는 ‘중(中)’으로, 부황(浮黃)이 들어서 걸식하며 조석을 잇기 어려워 무상분배에 들지 못하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자를 ‘하(下)’로 구분하였다. ‘하’에 포함된 사람이 진민으로서 그중에서 다시 완급을 고려하여 하일등(下一等)·하이등(下二等)·하삼등(下三等)으로 세분하였다. 이렇게 등급을 세분화한 것은 환곡분급 대상자와 무상분급 대상자를 정밀히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무상분급 대상자를 3등분한 것은 가장 빈궁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곡물을 지급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문헌]
■ 『오산문첩(烏山文牒)』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정형지, 「조선 후기 진급(賑給) 운영에 대하여」, 『이대사원』 26,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