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환곡은 봄에 분급받고 가을에 갚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흉년으로 수확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환곡의 징수를 미루어 주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환곡이 증가하는 시기에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존재하였으며, 완전히 탕감(蕩減)해 주지 않는 이상 미징수 환곡은 대부분 징수 대상이 되었다. 징수하지 못한 묵은 환곡을 구환(舊還)이라고 하였는데, 19세기 전반에는 환곡의 징수를 강화하면서 구환을 세밀히 분류하였다.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仍停),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18세기에는 구환에 대한 탕감이 이루어지곤 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구환의 탕감을 억제하였다. 탕감이 억제되자 장부상의 액수만 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류곡(虛留穀)의 액수가 증가하였다[『고종실록』 17년 10월 3일]. 1862년에는 전체 환곡의 54% 이상이 허류곡일 정도로 환곡 운영이 부실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기근으로 인한 농민의 파산과 이들의 사망으로 인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징수할 가능성이 없어진 경우에는 탕감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도 이런 과정에서 환곡 원곡(元穀)의 감소가 발생하였다. 정부에서는 환곡 원곡의 감축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하더라도 징수하지 못한 연도를 기록하고, 오래된 미징수 환곡부터 거두어들여 환곡 원곡의 감소를 방지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미징수 환곡을 징수하지 못한 기간에 따라 둘 또는 셋으로 구분하여 환곡의 징수를 강화하였다. 이때 1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정퇴로 분류하였다.
[내용]
17세기 후반 환곡은 분급된 시기를 기준으로 당해 연도에 분급된 신환(新還)과 당해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으로 구분되었다. 구환은 해마다 독촉해도 거두어들일 가망이 없는 것이 많았다. 환곡의 원곡을 적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환은 큰 흉년이 아니라면 반드시 징수해야 했으며, 구환도 일부를 징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구환도 환곡 액수에 포함된 것이었으므로 당해 연도에서 멀리 떨어진 연도의 구환부터 징수하도록 하여 총액의 손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한 구환 징수를 독려하기 위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양을 기준으로 지방관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까지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아직 고질적인 폐단으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1776년 당시 전국에서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1,290,000여 석으로 전체 환곡 액수의 약 15%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구별을 구체화하였다.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이런 정퇴·잉정·구환은 정부에서 징수의 연기를 허가한 것이었다. 마땅히 징수해야 할 곡식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읍미봉(邑未捧)이라 하였는데, 이는 구환에 포함되지 않았다.
[변천]
18세기에는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구환에 대하여 탕감이 이루어지곤 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구환의 탕감이 정부 차원에서 억제되었다. 또한 19세기의 환곡 운영은 18세기와는 달리 미징수 곡물에 대한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정부에서 징수를 연기해 주는 구환의 액수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명목상의 환곡 총액을 유지하게 했을 뿐, 실제 각 지역에서는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다수 존재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자연재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많은 양의 환곡이 진휼의 재원으로 소비되었다. 이로써 환곡량은 줄어들었고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증가하였다. 그 결과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862년의 환곡 상황은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이 절반을 넘는 54%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런 허류곡을 무리하게 징수하려는 시도는 결국 백성들의 저항을 초래했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 오일주, 「조선 후기 재정 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