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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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公賑)

서지사항
항목명공진(公賑)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진휼(賑恤)
관련어사진(私賑), 구급(救急)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중앙 아문에서 운영하는 환곡으로 시행하는 진휼.

[개설]
농업 생산이 사회의 근간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나 가뭄 등으로 인한 기근이 항상 발생하였다.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진휼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잦은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따라 진휼에 소요되는 곡식이 재정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에서는 기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재정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기근 정도에 따라 국가의 개입 여부를 판단하여 진휼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진휼을 모두 3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중앙 아문의 환곡을 활용하여 국가가 직접 시행하는 공진(公賑), 지방 수령이 마련하여 비축한 자비곡(自備穀)이나 개인 소유의 곡식을 활용하는 사진(私賑), 기민의 수가 극히 적어서 곡식이 거의 들지 않는 구급(救急)이었다. 기근이 발생한 지역을 3종류로 분류하여 각각의 방식대로 진휼을 시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공진읍(公賑邑)은 기근의 정도가 심한 지역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는 잦은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의 대책 마련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조대 후반부터는 이전 시기의 축적된 진휼 경험을 바탕으로 진휼정책을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조대 초반에 이르면 진휼방식을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진휼에 관련된 각종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일성록』 등의 관찬 기록에서도 진휼을 기록할 때 일정한 법식을 갖추게 되었다.

정조대에 기근 지역을 공진·사진·구급으로 분류하게 된 경위와 목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국가의 재정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진휼은 일반적인 환곡의 분급과는 달리 무상 분급이 원칙이었고, 따라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따라서 기근이 심한 지역에만 국가가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는 지방 재정 등을 활용한 진휼을 시행하도록 제도화한 것이었다.

기근 지역을 공진·사진·구급으로 분류하여 진휼을 시행한 최초의 기록은 1778년(정조 2) 경기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 4도에 대한 진휼이었다[『정조실록』 2년 5월 5일]. 이를 통해 볼 때, 공진읍을 선정하는 조치는 정조 즉위 이후 바로 시행되었다.

[내용]
정조대 정비된 공진의 구체적 시행 내용은 『만기요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공진읍을 지정하였고, 지정된 읍에서는 감사와 수령의 지휘 아래 진휼을 시행하였다. 공진을 마치면 해당 내용을 기록하여 장계(狀啓)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진휼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수령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공진에는 중앙 아문의 환곡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 소속의 상진곡(常賑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빈번한 진휼의 시행으로 인하여 상진곡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비변사 소속의 환곡이 공진에 전용(轉用)되기도 하였다.

진휼곡의 분급은 10일 간격으로 월 3회 시행하였는데, 장년 남성에게는 쌀 5되, 장년·노년 여성에게는 4되, 기타의 경우에는 3되씩을 지급하였다. 곡물 외에도 죽이나 소금, 장, 미역 등을 분급하였는데 이런 물품들은 정해진 항식을 두지 않았다.

위와 같은 규정이 공진에서 기본적으로 시행되는 원진(元賑)이라면, 이와 별도로 국왕이 하사한 물품을 분급하는 별진(別賑)이 시행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8년 1월 14일]. 별진은 왕이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정책으로 활용되었는데, 숙종대부터 관례화되었다. 별진으로 왕은 왕실의 진상품·내탕전 등을 내려 주거나 혹은 지방 감영·수영, 수령의 자비곡(自備穀) 등이 활용되었다.

[변천]
정조대 정비된 진휼정책은 이후 조선의 공식적인 진휼대책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환곡 운영이 점차 재정 보용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운영상에서도 갖은 폐단이 노출되었다. 이에 따라 환곡을 활용하는 국가의 진휼정책 역시 원활히 기능하기 어려워졌고, 중앙 아문의 곡식을 활용하는 공진 역시 위축되어 갔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집필자] 문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