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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에서 조선전기까지, 국가에서 염세로 걷은 소금 중 일부를 시가보다 싼 값으로 곡식과 바꾸어 주던 제도, 또는 그 소금.
[개설]
조선전기 각 도에서는 납부받은 염세(鹽稅) 중 일부를 상납하고, 그 나머지는 각 도에 비축하여 경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각 도에서는 경비로 쓰고 남은 소금이 있으면 평민을 대상으로 해서 시가보다 싼 값으로 미곡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얻은 미곡은 군자곡(軍資穀)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가리켜 과염법이라고 하였고, 시가보다 싸게 곡식과 교환하는 소금을 의염이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4년 9월 8일].
[내용 및 특징] [변천]
고려시대에 의염창(義鹽倉)을 설치하고 매년 봄가을에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우선적으로 추포(麤布) 1필을 납부하게 하고 소금 20두를 받아가게 하였는데, 이를 반염(頒鹽)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도 이러한 조치가 계속되었으나, 그 내용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의염창을 혁파하고 사재감에서 이 일을 관장하였으며, 환과고독뿐만 아니라 관료와 평민 모두에게 포(布)·저화(楮貨)·동전(銅錢)을 납부하여 소금을 15두까지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15두 이상의 소금 교환은 오직 환과고독에게만 허용하였다. 그 후 군자감(軍資監)에서 이 일을 관장하여 쌀 1두를 납부하면 소금 5두를 교환해 주었다. 이는 당시 시가보다 싸게 소금을 교환해 주는 것이었고, 이를 의염이라고 하였다. 1446년부터는 시가에 비하여 소금 1두를 더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당시 소금 시가가 쌀 1두에 소금 2두였으므로, 쌀 1두를 납부하면 소금 3두와 교환해 주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박평식, 「조선 전기 염의 생산과 교역」, 『국사관논총』 76, 1997.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