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공물은 공안에 의거하여 대개 각사 → (각도 감사) → 각관 수령 → 각면(各面) → 각호(各戶)의 체계로 부과·징수되었다. 각 군현의 수령은 그해 군현에 분정된 공물을 마련하고 공리에게 주어 중앙 각사에 직접 납입하도록 하였다. 공리가 공물을 각사에 납부할 때 최종적 관문은, 수령이 발급한 공물명세서인 진성(陳省)과 공리가 가지고 온 공물을 각사의 관원이 대조·점검하는 간품(看品)이었다. 하지만 각사 관원의 간품은 형식에 불과하였고, 실제 그 실무는 각사의 이(吏)·노(奴)에게 맡겨져 있었다.
각사의 이는 동반 경아전(京衙前)인 서리(胥吏)를 가리켰다. 이들이 담당했던 주요 직무는 전곡의 출납을 비롯하여 공문서의 작성과 접수·전달, 보관·관리, 각종 기록을 베껴 적는 일, 그리고 연락하고 보고하는 등의 사무였다. 지방군현의 공리가 가져 온 공물의 수납도 이들이 담당하였다. 각사의 노비는 각사 또는 궁궐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노비[差備奴]와 관원을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일을 하는 노비[根隨奴]가 있었다. 각사의 이노들은 공리가 가지고 온 공물과 수령이 발급한 공물명세서인 진성을 대조할 때 으레 뇌물을 요구하였다. 만약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공물의 품질이 아무리 우수해도 억지로 흠을 잡아 접수하지 않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각사의 이노 대부분에게는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노들은 공물 수납 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노역 대가를 얻었다. 1470년(성종 1) 6월 국가에서 모든 공물을 수납할 때 수수료를 제정하였던 것도 각사 이노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수수료는 원래 종이[紙]로 납부하였으나 후에 면포로 납부하였다. 그러나 각사의 이노들은 규정된 수수료[作紙價]보다 많이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로 인해서 공리들이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심지어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각사의 이노가 규정된 수수료보다 더 거둘 경우에는 공리가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허락하였다. 사헌부도 또한 부정한 이노를 자주 적발하여 죄를 물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부정은 끊이지 않았다. 1472년(성종 3) 3월에는 각사 이노들이 저지르는 부당한 공물 점퇴에 대한 감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 후 『경국대전』 단계에 와서는 감찰을 파견하여 그 수납의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내용]
각사의 이노가 공물을 점퇴하면 공리는 군현에 돌아가서 백성에게 다시 공물을 거두어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공리가 서울과 본 고을을 왕복하는 사이에 때로는 공물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가는 각사에서 공물을 점퇴할 경우에는 반드시 호조에 신고하여 재심사를 받도록 하였고, 그 점퇴가 부당한 경우에는 관리와 사령을 아울러 벌주도록 하였다.
각사의 이노가 공물을 부당하게 점퇴하였을 때 공리가 신고하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공리는 이를 신고하지 못하였다. 설사 그 부당함을 알리더라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도리어 관리들의 보복이 따르기 일쑤였다. 따라서 공리가 각사에 공물을 납부하기 위해서는 각사 이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변천]
각사의 이노는 외방 공물을 수납할 때 그 역할을 이용하여 처음에는 사주인(私主人)과 결탁해 방납을 일삼았다. 그러나 예종대 이후에는 직접 방납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6월 공조 판서 양성지는 각사의 노자들이 그 실무를 빙자하여 생초(生草) 수납 시 풀이 푸른데도 시들었다고 하여 물리치고, 돼지 수납 시에는 살찐 돼지를 수척하다 하여 물리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남문으로 물리쳤던 생초를 서문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대납하며 점퇴한 돼지는 자기 집에서 길러 후일의 대납을 기한다고 하였다. 또한 공리가 바치는 실[絲]의 품질이 우수해도 좋지 않다고 하고, 자기들이 대납하는 실은 품질이 좋지 않아도 좋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많은 값을 주고 그들이 대신 바치도록 한다고 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그들이 공물 대납을 할 때에는 같은 무리는 물론이고 상급 관원과도 결탁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였다. 거기에는 각사마다 현직에 있는 관원은 물론이고 전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