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일반 기록에서는 왕에게 바치는 진상(進上)과 용어를 혼용한 경우도 있으나 법전에서는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비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매 신년에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일에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에는 천추사(千秋使)를 정기적으로 파견하였다. 그 후 동지사(冬至使)를 한 번 더 보냈다. 이외에도 계품사(啓稟使)·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의 명목으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정사·성절사·천추사·동지사 정규 4사에는 진헌방물을 세공(歲貢)으로 가져갔고, 그 밖의 사행에도 세공방물수목(歲貢方物數目)에 준하여 진헌물목수(進獻物目數)가 제정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중국에 사신이 갈 때는 정기·비정기 사행을 막론하고 진헌물을 바쳤다. 중요한 진헌물은 말·돗자리·인삼·가죽·직물 등이었다. 조선은 이렇게 진헌을 통하여 중국과 장기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선진국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여 자국의 발전과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내용]
말은 정기·비정기 사행에 모두 바쳤는데, 후자를 별마(別馬)라고 하였다. 진헌하는 말은 색과 크기를 정하여 종류마다 수를 지정하였다. 정기 사행 때 진헌하는 말은 50필 정도였다. 크기는 세종대 주척(周尺)으로 5척 7촌 이하, 5척 4촌 이상이었다. 별마는 더 커서 6척 이하, 5척 8촌 이상이었다[『세종실록』 12년 8월 24일]. 말 가격은 상등이 1필에 면포 50필, 중등이 45필이었다. 때로 중국 측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말에 대한 명의 요구는 고려말부터 문제가 많았다. 조선초에 그 요구는 한층 강하게 나타나 1394년(태조 3) 4월에는 말 10,000필을 요구하였고[『태조실록』 3년 4월 4일], 1395년(태조 4)에는 연왕(燕王)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군마의 진헌을 요구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6일]. 1401년(태종 1) 9월에는 명의 사신 축맹헌(祝孟獻) 등이 칙서를 가지고 와서 민간인 소유의 말을 시가(時價)에 맞추어 바꾸고자 한 사실까지 있었다[『태종실록』 1년 9월 15일]. 이후 점차로 명의 말에 대한 요구는 수탈적 성격을 띠었다.
진헌에 쓰였던 돗자리는 황화석(黃花席)·채화석(彩花席)·만화침석(萬花寢席)·만화염석(萬花簾席)·만화방석(萬花方席) 등이었다. 베[布]는 화폐 대용인 정포(正布)가 5승포였는데, 진헌포의 규격은 15승포여서 1필 값이 정포 18필에 해당하였다. 또한 모시·삼베·명주 등을 진헌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세마포인 흑마포(黑麻布)를 귀중하게 여겼다. 이들 물품의 조달은 제용감에서 담당하였다.
가죽은 표범과 수달의 가죽이었다. 가죽에 상처가 있으면 안 되었고, 1장 가격이 말 1필 값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였다. 백성들로서는 조달하기 매우 어려운 진헌품이었다. 진헌물은 중요한 것이므로 종류와 규격, 구입 방법과 가격을 법전에 명시하였고, 지방에서 공납하는 것은 관찰사가 품질을 검사하여 바치도록 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이 밖에 환관[火者]과 처녀[貢女]를 진헌하였다.
[변천]
조선초 이래 명나라가 요구한 품목 중에서 조선에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금과 은이었다. 당시 조선은 매년 금 150냥과 은 700냥을 진헌으로 명나라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금·은의 국내 유통을 제한하고 민간 소유의 금을 수집하였으며,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금·은을 수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대명외교를 통하여 면제받는 것을 최선의 정책으로 여겼다. 이에 조선에서는 금·은의 대체 물품에 대하여 논의하여 말[馬匹]과 모시[苧麻]로 대신하고자 하였다. 이에 명나라에 금·은을 다른 토산물로 대체하고 조공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세종대에 세 번에 걸쳐 금·은의 면제를 명에 요청하였고, 명 선종(宣宗)대에 이르러서 조선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은 금·은을 면제받는 대신에 말과 명주 등을 진헌품에 새로 추가하였다.
응골(鷹鶻)은 1427년(세종 9) 이후부터 명 황제의 요청에 따라 매년 진헌하였다.
청나라 때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방물이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완화되었다. 명나라 때 성행하던 처녀·환관·말의 요구도 없었고, 진헌품의 감면도 비교적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