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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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

서지사항
항목명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공물(貢物)
동의어전공(田貢), 전결공물(田結貢物), 전세공물(田稅貢物), 전세소출공물(田稅所出貢物), 전세소납공물(田稅所納貢物)
관련어원공물(元貢物), 공상아문(供上衙門)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전세의 편리한 수송을 위하여 전세의 일부를 정포·꿀·기름·잡곡 등으로 내게 한 것.

[개설]
과전법의 전세 수취 규정에 의하면 논에서는 조미(糙米)를, 밭에서는 잡곡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전세 수취에서 곡물 대신에 정포(正布)·면포·명주·모시 등을 거두기도 하였는데, 이를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이라 하였다.

전세조공물은 ‘전세소출공물’ 혹은 ‘전세소납공물’이라고도 하며, 전세에서 나오는 공물 혹은 전세에서 바치는 공물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포류(布類)는 전세백저포(田稅白苧布)·전세포화(田稅布貨)·전세포자(田稅布子) 등으로 지칭되었고, 참기름·들기름과 꿀[蜜]·밀랍[蠟] 등이 팥·메밀·중미(中米)와 함께 전세에 포함되었다.

전세조공물이 상납되는 중앙 각사는 주로 왕실공상(王室供上)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왕실과 관련 있는 내자시·내섬시·인순부·인수부 등에서는 공상에 필요한 기름[油]·꿀·포를, 예빈시에서는 사신의 연향(宴享)이나 제향에 사용할 기름·꿀을, 의영고에서는 사신 접대나 궁궐에서 필요한 기름·꿀을, 제용감에서는 의복을 하사하거나 왜인(倭人)에게 답례·진헌(進獻)하는 등에 필요한 포류(布類)를 위전(位田)에서 수취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과전법 체제 하에서 전세는 쌀·보리·밀 등의 곡물류로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곡물 대신에 정포·면포·명주·모시 등으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수송에 따르는 농민의 고역을 다소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내용]
전세조공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1401년(태종 1) 5월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올린 내용에 잘 나타나 있었다. 즉, 제고(諸庫)·궁사(宮司) 및 호조·공조·내부시·광흥창 등에서는 소속되어 있는 위전(位田)에서 포·꿀·밀랍·기름·모시·미포(米布) 등을 전세 명목으로 징수하였다[『태종실록』 1년 5월 3일].

과전법 하에서 전세는 수확의 1/10을 내는 조세 비율[租率]에 따라 1결당 30두라는 세액이 법제화되어 있었고, 농사의 작황에 따라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세조공물은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정액 전세였다. 1409년에는 전세조공물도 농사의 작황에 따라 감면되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이 적용되었다[『태종실록』 9년 3월 19일]. 따라서 풍흉에 따라 각사의 세금 수입은 매년 달라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1445년(세종 27)에는 국용전제(國用田制)를 시행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즉, 과전법 하에서는 전국의 토지가 서울[京中]의 각사위전(各司位田)과 외군자위전(外軍資位田)으로 나뉘어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작황에 따라 전세 수입에 차이가 생겼다. 그리고 서울의 각사에서는 그 부족분을 으레 외군자에서 빌려서 충당하였다. 그런데 각사위전제의 형태는 각사별로 개별적으로 운용되어 그 계산이 번잡하였고, 새로 설정된 공법으로 계산해도 번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주군(州郡)의 역전(驛田)·아록전·공수전을 제외한 서울의 풍저창·광흥창위전과 각사위전을 모두 혁파하고 이를 국용전(國用田)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외방 각관은 서울의 각사에 납부하는 일정한 수를 계산하여 민가에 나누어 납부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관(官)의 국고에 납입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편리할 뿐 아니라 민간에서 납부하던 미곡(米穀)·밀랍·포화(布貨)의 고되고 헐한 것이 거의 고르게 된다고 보았다. 각사위전제 하에서의 전세조공물인 미곡·밀랍·포화는 미곡의 시중 가격으로 적당히 환산해서 정한 것이었지만 풍흉 때문에 매년 시가와 큰 차이가 났다. 더욱이 그것들은 각사에 개별적으로 분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의 부담이 관청에 따라 각각 달랐다.

국용전제가 시행되면서 전세조공물도 개정되었다. 1437년(세종 19) 공법(貢法)에서는 정포 1필에 하전(下田) 1결 20복(卜)이 할당되었고, 그 소출 액은 콩 19두(斗) 2승(升)이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19두로 정해졌다. 그러나 기름과 밀랍의 경우는 기름 1두에 콩 9.76두, 밀랍 1근에 콩 19.504두에 준한다는 수정된 수치만 확인될 뿐이었다.

[변천]
조선건국 초에는 전세로 내는 포의 값[田稅布價]이 정포 1필에 쌀 15두, 콩 30두였다. 1437년 공법이 제정되면서 19두로 개정되고, 이것은 또다시 12두로 개정되었다. 1469년(예종 1) 9월에는 정포 1필을 황두 10두에 준하도록 규정하였고, 이것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다. 한전 매 1결당 전세로 내는 포화(布貨)는 건국 초에 정포 1필이 황두 30두에 준하던 것이 후에 20두·19두·12두·10두로 줄어들었다. 조선후기 효종대 호서대동법을 시행한 이후에는 전세조공물을 쌀과 콩으로 통일하고 이를 위미(位米)·위태(位太)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강제훈, 「조선초기의 전세공물」, 『역사학보』 158, 1998.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박도식, 「조선전기 전세조공물 연구」, 『인문학연구』 제8집, 2004.
■ 이재룡, 「조선초기 포화전에 대한 일고찰」, 『한국사연구』 91, 1995.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집필자] 박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