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공물은 공안(貢案)에 의거하여 대개 각사 → (각도 감사) → 각관 수령 → 각면(各面) → 각호(各戶)의 체계로 부과·징수되었다. 각 군현의 수령은 당해 군현에 분정된 공물을 마련한 다음 공리가 중앙 각사에 직접 납입하도록 하였다. 공리는 지방관아의 서원(書員) 중에서 선발되었는데, 그 선발은 지방 자체에 맡겨져 있었다.
[담당 직무]
공물은 거의 한강을 이용하여 서울과 가까운 서강·용산·두모포의 육지에 내려졌다. 공리는 이곳에 도달한 공물을 지정된 각 강창(江倉)이나 제사창고(諸司倉庫)에 납부하였다.
공리가 공물을 납부할 때 거치는 최종 관문은 각사의 관원이 실제 공물과 공물 내역이 적힌 문서인 진성(陳省)을 대조·점검하는 간품(看品)이었다. 그러나 관원의 간품은 거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실무는 거의 각사의 이노(吏奴)에게 맡겨져 있었다. 이들은 공리가 바치는 공물의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온갖 흠을 잡아서 돌려보냈다. 각사의 이노들이 공물을 돌려보내면 공리는 그들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납부하든지, 아니면 돌아가서 당해 군현의 백성에게서 공물을 다시 거두어 납부해야 했다. 각사의 이노가 공물을 자의로 돌려보내지 않더라도, 각사의 사정으로 지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각사의 이노가 공물 수납의 수속을 제때 취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공리는 부득이 서울에 장기간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공리가 각사에 공물 납입을 마치고 각사로부터 준납첩(准納帖)을 받으면 그 책임을 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사의 이노는 수납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공물을 수납한 후에도 곧바로 준납첩을 발급하지 않고 일을 빙자하여 뇌물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변천]
민간에서 일정한 값을 지불하여 공물을 대신 상납하는 방납이 허용되기 이전에는 공리가 상경하면 으레 그 본읍 소속의 숙박시설인 경저(京邸)에 투숙하면서 경주인의 알선에 의해 공물상납의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세조대 공물 방납이 허용된 이후에는 공리가 공물을 감추어 두고 상납하지 않거나 상인과 결탁하여 공물을 팔기도 하였고, 상고(商賈)와 결탁하여 공물을 다시 사서 이익을 나누기도 하였다. 공리에 대한 감독과 처벌 규정이 1464년(세조 10)에 이르러 제정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세조실록』 10년 8월 1일].
공리의 부정 도용(不正盜用)과 공리에 대한 감독 규정에 따르면, 진성에 공리의 출발 일시를 기록하여 1건은 공리에게 주고, 1건은 감사를 거쳐 호조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 1471년(성종 2)에는 공물을 판매하고 3개월이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은 공리는 장 100대를 때리고 그 주인에게도 아울러 세금을 부과하였다. 1년이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은 자와 원래 양의 2/3를 납부하지 않는 자는 당사자와 가족을 평안도나 함경도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율을 적용하였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