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횡간(橫看)

서지사항
항목명횡간(橫看)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비(經費)
동의어경비식례횡간(經費式例橫看)
관련어공안(貢案), 경비식례(經費式例), 신횡간(新橫看),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 횡간식례(橫看式例)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세출 예산표.

[개설]
조선시대의 세출 예산표는 가로[橫]로 기재하여 가로·세로로 대조해 보는 서식(書式)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형태 때문에 세출 예산표를 횡간이라 불렀다. 정식 명칭은 경비식례횡간(經費式例橫看)이었다. 횡간에는 왕실 경비, 각사의 경비, 국상(國喪)에 쓰이는 제반(여러 가지) 경비,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 경비와 외국 사신 접대에 필요한 경비, 관료들의 녹봉, 구휼, 군기감이 수취하는 군기물(軍器物) 등이 수록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초기부터 출납·회계에 관한 감찰 규정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경비식례는 없었다. 이 때문에 경비의 지출은 방만하게 운영되었다. 방만한 경비 운영은 필연적으로 백성에게 많은 공물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횡간을 제정한 것은 방만한 경비 운영과 과다한 각사의 경비 책정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내용]
세종대에 경비식례가 없는 각사에서 지출한 잡물의 수량을 파악한 결과, 실제 경비보다 2~3배 이상이 지출되었다. 1426년(세종 8) 경비식례의 제정은 방만한 경비 운영과 과다한 중앙 각사의 경비 책정을 바로잡고자 추진된 것이다.[『세종실록』 8년 10월 22일]. 1440년(세종 22) 5월에는 이전에 제정된 식례의 유무를 막론하고 다시 식례를 제정할 것을 명하였다[『세종실록』 22년 4월 21일]. 그리고 1443년(세종 25) 12월에는 식례가 없는 각사는 그때까지 사용한 잡물 제작 경비의 수량을 참고하여 식례를 제정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5년 7월 29일]. 이를 바탕으로 국용전제가 시행된 다음 해인 1446년(세종 28) 정월에 이르러 각사의 공용물은 물건마다 시험하여 수량을 참작 결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8년 1월 22일]. 또 결손 나는 자료는 예비로 1푼을 더하여 각사·호조 및 가각고(架閣庫)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게 하여 영구히 출납의 격식(格式)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비식례는 모든 관사가 아닌 재정 지출과 관련 있는 43개 관서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 각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경비가 아닌 만들어 쓰는 물품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각사의 경비식례 제정은 향후 횡간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세종대에 일부 중앙 각사에 정해졌던 경비식례를 다시 추진한 왕은 세조였다. 세조는 호조와 상정소에 명하여 세종대에 제정된 일부 각사의 경비식례를 궁궐에서부터 지방 고을에 이르기까지 확대 제정하게 하였다[『세조실록』 2년 10월 30일]. 경비 용도의 규제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관사에서 1년 동안 사용되는 물량과 수입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좌우로 나누어 중앙 각사와 지방군현의 회계를 서로 교정하게 하였다. 경비 남용을 방지하고 경비 출납을 철저하게 하며, 경비 계산을 담당하는 산학중감(算學重監)의 태만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461년(세조 7) 7월에는 탁지사를 설치하여 호조 판서 조석문(曺錫文)에게 중외탁지사를 총괄하게 하였다[『세조실록』 7년 7월 12일].

세조는 횡간 작성을 위해서 친히 그 예산 규모를 내려 주기도 하였고, 직접 횡간을 교정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조의 열성적 노력으로 마침내 1464년(세종 10) 정월에 횡간이 완성되었다[『세조실록』 10년 1월 27일]. 횡간의 제정은 지금까지 일정한 지출 계획 없이 관례에 따라 경비를 지출하던 것에서 벗어나 지출 예산표에 따라 경비를 지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식례횡간의 상정에는 여러 관리가 동원되었지만, 이것이 완성되기까지 깊이 관여한 사람은 호조 판서 조석문과 김국광(金國光)이었다. 호조에서 아뢴 차자에 조석문의 이름만 있으면 그 내용을 살피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세조는 그를 신임하였다. 그는 재정에 대한 식견과 세조의 신임을 배경으로 1459년(세조 5)부터 1466년(세조 12)까지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김국광은 여러 각사[諸司]의 횡간을 상정할 때 그 추진 과정과 내용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업무에 정통하였다.

그런데 이때 완성된 식례횡간은 너무 빠른 시일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는 이를 개선하고자 횡간을 친히 열람하기도 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쳐 횡간의 틀린 곳을 개정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죽음으로써 횡간의 문제점은 개정되지 못하였다.

그 후 성종은 세조대의 횡간을 토대로 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1473년(성종 4) 9월에 이르러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을 완성하였고[『성종실록』 4년 9월 20일], 다음 해 횡간식례(橫看式例)를 완성하였다[『성종실록』 5년 윤6월 26일]. 조선왕조에 들어 국가의 경비 지출이 횡간에 의거해서 출납하게 된 것은 1474년(성종 5)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완성된 횡간은 국가 경비를 절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 왕실의 경비 지출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증가함에 따라 1501년(연산군 7) 7월에 공안을 개정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7월 17일]. 이것이 신유공안(辛酉貢案)이었다. 공안 개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지만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의 구조화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항상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이로 인하여 인납(引納)·가정(加定) 등이 거의 일상화되었다.

[변천]
횡간은 대동법 실시 이전까지 세출 예산표로 사용되었으나,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횡간 외에도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참용하였다. 현재 『충청도대동사목』과 『전남도대동사목』이 남아 있다. 대동사목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는 대동법 시행에 관계되는 기구의 조직과 구성이고, 둘째는 대동미(大同米)의 부과와 징수이며 셋째로는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의 용도였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Ⅰ』, 일조각, 1984.
■ 이종일 외, 『대전회통 연구: 호전·예전편』, 한국법제연구원, 1994.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박도식, 「조선초기 국가재정의 정비와 공납제 운용」, 『관동사학』 7, 1996.
■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제19호, 2005.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집필자] 박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