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본래 진상이란 공헌(貢獻)과 같은 뜻으로, 아래에서 위로 바치는 것을 말하였다. 그 명목은 크게 물선(物膳)·방물(方物)·제향천신(祭享薦新)·약재(藥材)·응자(鷹子) 등과 별례진상(別例進上)으로 나누어졌다. 진상 물자에는 짐승류·어류·조류·채소류·과실류·기구류를 비롯하여 모피·약재류, 그리고 기타 장식품 등이 포함되었다.
공물은 중앙에서 지방군현에 분정하였지만, 진상은 관찰사와 병마·수군절제사에게 분정하였다. 관할 군현에 대한 분정은 이들 문무관의 권한에 위임하였고, 민가에 대한 분정은 수령에게 위임하였다. 그 제도는 공물과 성격을 달리했지만, 생산되지 않거나[不産] 구하기 어려운[難備] 물자의 조달과 상납 등은 공물과 비슷했다. 공물은 중앙 각사에 상납되었고, 진상 물자는 전적으로 궐내 각사(闕內各司)에 납입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진상은 공물과 달리 각도 관찰사, 병마·수군절제사를 비롯한 지방 장관이 왕에게 바치는 예물이었다. 주로 국가 제사에 사용하는 음식물이나 각사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관찰사와 절도사는 이러한 물품들을 각관의 수령에게 분정하였고, 분정받은 지방관은 진상 물자를 갖추어 상납하였다. 진상은 각관에서 직접 준비하여 바치는 관비진상(官備進上), 각관의 민가에서 수취·상납하는 민비진상(民備進上), 정역호(定役戶)로 나뉘었다.
당번군사(當番軍士)를 역을 지거나 사냥하여 바친 조류(鳥類)·짐승류·어류와 채소·과일은 관비진상이었다. 정역호는 전문적인 기술 습득이 필요한 일이라 그 직이 세습되었다. 여기에는 사재감 소속의 소목군(燒木軍)·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공염간(貢鹽干)·응사(鷹師)·약부(藥夫)·생선간(生鮮干)·소유치[酥油赤]와 생안간(生雁干)·아파치[阿波赤]·해작군(海作軍)·산정간(山丁干)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진상의 대부분은 민가에서 징수되었다.
[내용]
물선진상은 매월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왕실에 바치는 식료품을 말하였다. 조선초의 기록을 보면 왕·왕비·왕세자·전왕(前王)·전왕비가 그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지방관이 임의로 징수하였으나, 1419년(세종 1) 각 지방의 수령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아 정해진 날짜에 그 물목의 송장(送狀)과 물선을 사옹방에 바치도록 규정하였다[『세종실록』 1년 12월 22일].
방물진상은 명일(名日)에 바치는 명일방물과 왕의 행행(行幸) 때 바치는 행행강무방물(行幸講武方物) 등이 있었다. 명일이란 명절과 절일(節日)을 말하는데, 명절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을 말하고 절일은 축일(祝日)을 말하였다. 이때는 갑주(甲冑) 등 병기(兵器)·모피·기구·백포(白布) 및 산해진미를 바쳤다. 또 왕이 선왕의 능에 참배하거나 온천에 목욕하기 위하여 행차할 때에도 진상물을 바쳤다. 강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 2차례씩 수렵을 위하여 지방에 나갈 때에는 그 지역의 관찰사가 차사원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제향·천신진상은 시절제사(천신)를 비롯하여 왕실의 각종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원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은 중앙의 각 기관에 맡겨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양이나 돼지는 전농시·내자시·전구서, 채소류는 침장고, 과실류는 상림원이나 혜민서·양현고·내자시 등이 맡아서 진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담당 관청이 마련할 수 없는 것은 지방 각 관에 나누어 바치도록 하였다.
약재진상은 각 지방관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이른바 향약(鄕藥)을 채취하여 내의원이라고도 불렀던 내약방에 상납하도록 한 것이었다. 지방관은 의원(醫院)과 의생(醫生)을 설치하고 약부(藥夫)라고도 불렀던 채약인(採藥人) 및 약포(藥圃)를 두어 향약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특히 채약인은 약재에 대한 지식, 채취 및 건조 등 특별한 기술을 익혀야 했으므로 정역호라고 하여 다른 잡역을 면제하고 세습제로 운영되었다.
응자진상은 고려후기 이래 설치된 응방(鷹坊)에서, 중국에 진헌(進獻)하거나 왕의 수렵에 사용하기 위하여 매를 바치던 것을 말하였다. 응방에서는 실무에 종사하는 응인(鷹人)이 있어서 매를 잡거나 기르는 일을 하였다. 이들 역시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개는 가업으로 세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의 진상이 더욱 확대되어 1442년(세종 24) 이후에는 일반 민가도 여기에 편성되어 매를 잡아야 했다. 이 경우에 이들의 잡역과 요역이 면제되었다.
[변천]
진상물자는 관부 혹은 정역호에 의하여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점차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다. 가령 사수감 소목군은 1398년(태조 7) 12월에 혁파되어 그들의 역이 민가에 전가되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소유치[酥油赤]는 1421년(세종 3) 11월에 폐지되어 역시 그 역이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다 [『세종실록』 3년 11월 28일].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虎豹皮]이나 큰 사슴의 가죽[大鹿皮], 기타 포육류(脯肉類)의 마련은 당번군(當番軍) 혹은 엽호(獵戶)의 역이었지만, 이것 또한 일반 농민에게 마련하도록 한 일도 적지 않았다. 진상의 분정도 공물의 경우와 같이 생산되지 않거나[不産] 구하기 어려운[難備] 물자를 분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물자는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으며, 공상아문(供上衙門)의 부족한 물자는 별례진상(別例進上)의 형태로 추가되어 부과되었다.
진상은 왕에 대한 예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 방납인들의 이권이 개입되어 쉽사리 개선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1결당 쌀 12말[斗]씩을 징수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해마다) 상납하던 진상물의 일부를 대동저치미로 구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고 해서 모든 진상이 대동세로 징수된 것은 아니었다. 천신(薦新)·약재(藥材)·삭선(朔膳)·명일물선방물(名日物膳方物)·인삼의 진상은 여전히 현물로 상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