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정역호는 특수한 물품을 공물과 진상으로 상납하는 대신 전세 이외의 여러 잡역을 모두 면제받았다. 응사(鷹師), 채약인[藥夫], 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 염간(鹽干), 생안간(生雁干), 생선간(生鮮干), 산정간(山丁干), 포작간(鮑作干), 소유치[酥油赤], 아파치[阿波赤], 재인(才人), 화척(禾尺) 등이 정역호에 속하였다. 이외에도 특수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일반인 혹은 군사를 동원하여 정역호와 같이 그 의무를 명시해서 ‘모모군(某某軍)’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소목군(燒木軍)·해작군(海作軍)·취련군(吹鍊軍)·채포군(採捕軍) 등이 그런 예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정역호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 직은 세습되었다. 약재의 경우 지방관은 의원(醫院)과 의생(醫生)을 설치하고 약부(藥夫)라고도 불렀던 채약인(採藥人) 및 약포(藥圃)를 두어 향약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이 약재는 전의감·혜민서·제생원·동서대비원 등의 중앙 의료 기관에 상납되었다. 약재 채취는 그 종류에 따라 각각 일정한 시기가 있었는데, 특히 채취 시기가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후기 이래 응안간(鷹雁干)은 응방(鷹坊)에 소속된 자였다. 응방에는 실무에 종사하는 응인(鷹人)이 있어서 매를 잡거나 길렀다. 조선시대에는 매의 진상이 더욱 확대되어 1442년(세종 24) 이후에는 일반 민가에서도 매를 잡도록 하였고, 그 대신 이들의 잡역과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응사(鷹師)는 왕의 매 사냥[放鷹畋獵]과 행행(幸行)·강무(講武) 때 왕을 호위하였다.
[내용]
정역호는 그 직이 세습되었다. 예를 들면 경기 좌우도에는 사수감 수군에 소속되어 땔나무[燒木]를 상납하는 소목군(燒木軍)이 있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충청·황해·강원도에는 선공감·사재감 등에 소속되어 목탄(木炭)을 제조 상납하는 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가 있었다. 한강에서 통진에 이르는 물가의 각관 양민·공천(公賤) 중에서 선발한 120명을 3번(番)으로 나누어 매일 물고기를 잡아서 상납하는 사옹방 소속의 생선간(生鮮干)도 있었다[『세종실록』 23년 3월 10일]. 그 밖에 응사(鷹師)·아파치[阿波赤]·소유치[酥油赤]·약부(藥夫) 등이 있었다.
[변천]
정역호 중에는 생선간·응사와 같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폐지되고 그 공납역이 일반 민가에 전가된 것도 적지 않았다. 가령 땔나무를 상납하던 소목군은 1398년(태조 7) 12월에 혁파되어 민가에 땔나무 1태(駄) 이하의 비율로 부과되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소유치는 1421년(세종 3) 11월에 폐지되고 그 소유는 민가에 전가되었다[『세종실록』 3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