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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공안은 좁은 의미에서 공물의 세입(歲入) 장부를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전세를 비롯하여 공물, 진상, 어세(魚稅), 염세(鹽稅), 선세(船稅), 공장세(工匠稅), 공랑세(公廊稅), 행상노인세(行商路引稅), 신세포(神稅布), 노비신공포(奴婢身貢布), 각종 부역 등의 잡세 모두를 수록한 장부를 의미한다.
공안에는 각관 공안(各官貢案)·각사 공안(各司貢案)·각도 공안(各道貢案)·호조 공안이 있었다. 각관 공안에는 당해 군현에 분정된 공물의 종류와 수량, 그 군현이 상납해야 할 정부 관아가 기록되어 있었다. 각사 공안에는 지방 군현에서 징수해야 할 공물의 이름과 액수가 기록되어 있었다. 또 각도 감영에는 관할 각관의 공안을 통합한 각도 공안이 있었고, 호조에는 각도·각사·각관 공안을 통합한 호조 공안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국가 재정은 공안과 횡간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공물을 너무 적게 책정하면 국가 재정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많이 거두면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므로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대 국가의 재정은 세입·세출 예산이 원칙적으로 균형을 이루지만, 공안과 횡간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다. 국가 비용으로 최소한 3년 몫이 비축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명분 아래 공부의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공안은 1392년(태조 1) 10월에 주로 고려시대의 세입과 세출을 참작하여 제정되었다[『태조실록』 1년 10월 12일]. 이에 따라 국가 재정 수입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세출 예산표인 횡간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70여 년이 지난 세조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세조실록』 9년 11월 22일]. 횡간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국가의 경비 지출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지출한다[量入爲出]는 원칙이 있었지만, 실상은 용도의 크고 작은 정도를 그때마다 짐작하여 마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재정은 경비에 비하여 매우 방대한 공안의 수입으로 유지되었고, 이것은 결국 백성에게 공물을 부당하게 많이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세종대의 경우 공안 세입이 경비에 비해 방대한 액에 달하여 그 대비는 2~3배 이상, 물목에 따라서는 7~8배에 달하였다. 각사(各司)의 경비를 과다하게 책정해 그 폐해가 날로 늘어가자 1438년(세종 20) 무렵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공안의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세조대에 이르러 일대 혁신을 보게 되었다.
[내용]
조선시대 최초의 공안은 태조 즉위 직후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제정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공안을 개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1438년(세종 20)경 공부 부담액을 줄이려고 시도하였으나, 전면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공안의 전면적 개혁은 세조 때 이루어졌다. 1464년(세조 10) 2월에 횡간이 정비된 후 공안을 개정하기 위해 정인지·정창손·신숙주·한명회 등을 도청(都廳)으로 삼아 모든 도의 공물을 조사하여 상정(詳定)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0년 10월 28일]. 이때 상정한 공물은 물건의 무게[稱量]와 유무(有無)는 비교적 정교하였으나, 수륙(水陸)의 산물(産物)을 모두 참고하여 공물을 상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있고 없는 것이 서로 바뀐 것이 많았다.
세조는 국가의 경비에 대한 제도에 미진함이 있으면 성법(成法)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상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사망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 성종 역시 횡간과 함께 공안을 개정하는데, 성종대의 공안은 세조대의 공안에 비해 총 액수에서 1/3 정도 큰 폭으로 삭감되었다.
[변천]
성종대에 완성한 공안은 이전보다 크게 삭감되어 경비가 부족해졌다. 그 결과 정부는 으레 인납(引納)·가정(加定) 등의 임시적인 방법으로 부족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이러한 경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공안 개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경비 지출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연산군을 비롯하여 경비를 담당한 호조에서는 국용(國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01년(연산군 7) 7월에 공안을 개정하였는데, 이것이 신유공안(辛酉貢案)이다[『연산군일기』 7년 7월 17일]. 연산군 때 개정한 신유공안은 공안의 총액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의 구조화로 인해 공물과 진상은 계속 증대되어 폐해가 극심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로 공안의 주종을 이루었던 공물·진상은 거의 전세화되어 미(米)·포(布)로 납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안은 대동법 체제에 맞도록 변경되기만 했을 뿐, 대동사목(大同事目)·탁지정례(度支定例) 등과 함께 경비 수지의 대본(臺本)으로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활용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 공안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으로는 18세기 말엽 강원도의 공안으로 보이는 『강원도공물책(江原道貢物冊)』과 19세기 초엽 봉상시의 공안으로 보이는 『공물정안(貢物定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