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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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납(代納)

서지사항
항목명대납(代納)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공납(貢納)
하위어공물(貢物)
관련어방납(防納), 불산공물(不産貢物), 절산공물(絶産貢物), 난비지물(難備之物)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공물 품목을 다른 사람이 대신 납부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

[개설]
공납제는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각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로 직접 거두어들이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특산물이 많은 지역은 중앙 권력에 의해 항상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토작공의 원칙에 위배되더라도 때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을 배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입법 당시에는 생산되었어도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일반 백성이 만들어서 납부하는 물품 가운데 각궁(角弓)·선척(船隻)과 같이 만들기 어려운 ‘난비지물(難備之物)’ 역시 민가에서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임토작공을 원칙으로 하는 공납제에는 원래부터 대납(代納)의 소지가 있었다. 이에 국가는 일찍부터 대납을 허용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태조 때부터 단종 때까지는 원칙적으로 대납을 금하였지만,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특정인에게 대납하도록 하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그 까닭은 첫째, 필요한 물품을 적절한 때에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백성이 구입하기 어려운 것을 일괄 구입하게 하면 상납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으면서도 대납자에게는 적절한 이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셋째, 승려들에게 대납권을 주게 되면, 절의 건립과 같은 큰 역사(役事)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종실록』 즉위년 4월 28일 1번째기사].

[내용]
처음으로 인정한 공물 대납자는 승려였다. 세종 때 절의 건립이나 수리, 불상의 조성, 불경의 간행 등 막대한 경비가 드는 역사(役事)에서는 국법의 예외 규정에 따라 담당 승려들에게 공물의 대납권을 주었다. 관인·부상대고(富商大賈)·각사이노(各司吏奴) 등도 대납권을 얻었다. 이들은 미리 서류를 발급 받아서 중앙 각사(各司)에 공물을 대납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수령에게 어느 집은 몇 말, 어느 집은 몇 되를 수납하라는 문서를 받아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가를 받아냈다.

국법에서 예외 규정으로 인정했던 대납 공물의 품목은 초둔(草芚)·정탄(正炭)·부등목(不等木)·토목(吐木)·소목(燒木)·지지(紙地)·금칠(金漆)·청밀(淸蜜)·지율(芝栗) 등이다.

세조 때에는 전면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대납 허용책은 여러 가지 폐단을 불러일으켰고 예종 때부터 다시 강력한 대납 금지책을 실시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2월 9일]. 이 금지책은 성종 때에 완전한 기틀이 잡혀 비로소 조선시대의 공납제로 완성되었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대납의 금지책과 허용책이 번갈아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공물 대납에서 하나의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은 세조대였다. 즉, 세조 이전까지는 일부 공물에 한해 부분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으나, 1461년(세조 7)에 이르러 공물 대납에 대한 여러 규정이 정해졌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즉, 공물 부담자와 대납인이 동의할 경우에만 대납을 허용하였고, 대납 금액은 수령이 민가에서 공물 금액을 받아 대납자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백성이 희망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대납하는 행위, 대납 금액을 정가 이상으로 징수하는 행위, 그리고 대납 청부인이 관에 신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직접 민가에서 대가를 징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대납 금액은 대납자가 모든 각사의 필납문첩(畢納文牒)을 받았을 경우에만 받는 것을 허용하도록 하였고, 이를 어길 때는 그 값을 관에서 몰수하였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대납의 허용은 공물 가운데 백성이 납부하기 어려운 것을 백성의 바람에 따라 대납하게 하여 민의 재산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에서는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공물까지도 백성의 의사를 묻지 않고 대납 허가를 내주는 일이 많았다. 수령이 방납 모리배들의 간청에 응하거나 혹은 그들의 위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세조대에 허용되었던 대납은 예종이 즉위(1468)하면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6일]. 즉 “앞으로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실을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고 가산은 적몰한다. 비록 공사(公私)로 인한 범법자라도 마땅히 논죄할 것이다.”라는 조치를 내렸다. 예종은 5일 후 법령을 위반한 지방관에 대해 극형에 처할 것을 반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법으로 금하기 이전에 대납한 대가의 징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이듬해(1469) 정월 대납 금지를 반포하기 이전의 대납 금액은 관에서 징수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대납 금지책이 반포된 지 3개월 후에 내려진 이 조치는 새로운 법을 상당히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금지책은 『경국대전』에 “공물을 대납한 자는 장(杖) 80대, 도(徒) 2년에,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강제훈, 「조선 세조대의 공물대납정책」, 『조선시대사학보』 36, 2006.
■ 강제훈, 「조선초기의 부상 허계지의 신분과 권력 배경」, 『한국사연구』 119, 2002.
■ 김진봉, 「조선초기의 공물대납제」, 『사학연구』 22, 1973.
■ 김진봉, 「조선초기의 공물방납에 대하여」, 『사학연구』 26, 1975.
■ 박도식, 「조선전기 공물방납의 변천」, 『경희사학』 19, 1995.
■ 백승철, 「16세기 부상대고의 성장과 상업활동」, 『역사와 현실』 13, 1994.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집필자] 박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