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초기의 부세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와 중국의 전통적 수취 체제인 조용조(租庸調)제도, 그리고 당시의 사회 경제적 실정을 참작하여 실시하였다. 조선초기 공물의 품목에 대해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 자료로는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와 사찬 읍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광산물을 비롯하여 가죽 제품·대나무 세공품·직물·어물·약재·목재·종이·과실 등의 품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품목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면포, 평안도·황해도의 명주, 함경도·강원도의 마포, 강원도의 목재, 황해도의 철물, 제주도의 말, 전주·남원의 종이, 임천·한산의 생모시, 안동의 돗자리, 강계의 인삼 등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중세 사회의 부세제도는 백성의 각종 물품과 돈 등을 거두어들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가운데 중앙 각사와 왕실에서 필요한 물품은 여러 군현에서 공물로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공물에는 원공물(元貢物)과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이 있었다.
[내용]
조선전기에는 호적이나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이 모호한 상태로 운용되었다. 국가의 당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그처럼 미비하였기 때문에 수취제도를 실상에 맞게 운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공물을 비롯한 군역·요역 등의 국가적 수취는 군현 단위로 제각각 책정되었다. 그리고 공물이 각 군현을 단위로 책정되면서 작은 군현이 큰 군현에 비해 부세 부담이 훨씬 과중하게 되었다.
논밭에 부과되던 세금인 전세는 홍수·가뭄 등의 자연재해를 당했을 때 손실에 따라 감면해 주는 수손급손(隨損給損)이 적용되었다[『태종실록』 9년 3월 19일]. 그러나 공물은 원칙적으로 감면되지 않았다[『태종실록』 18년 7월 2일]. 물론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를 망치거나 사신 접대 등으로 백성들이 피폐해진 경우에는 왕이 공물을 한시적으로 감하거나 혹은 영구히 면제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흉황·기근을 당할 때마다 왕이 공물을 감면해 줄 수는 없었다. 무분별하게 공물을 감면하면 경비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에서 공물을 감면할 때에는 외방에서 납부하는 공물과 중앙 각사가 1년에 필요한 경비, 각사 창고에 남아 있는 수를 참작하여 감면하였다.
감면의 대상이 되었던 공물은 대부분 각 군현에서 이전에 미납한 공물이거나 각사에 있는 물품 가운데 여유분이 많은 물품, 국용에 긴요하지 않은 물품 등이었다. 국용에 긴요한 공물이나 다른 지역에서 나지 않는 공물은 흉년이 아무리 심해도 감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밖에 사신 접대에 쓰이는 공물도 대체로 감면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공물을 감면하거나 면제해야 할 때는, 이를 다른 읍에 대신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신 공물을 부과받은 군현의 백성에게 피해를 입혔다.
[변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부과하는 것이 원칙[任土作貢]이었다. 만약 어떤 특산물이 난다고 중앙에 일단 보고되면, 군현은 그것을 해마다 공물로 상납해야 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그 지방에서 어떠한 특산물이 나오더라도 해마다 공물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보고하려 하지 않았다.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만 공물을 분정하게 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으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도 분정하였다.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원래 그 지방에서 산출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수확량이 줄어든 경우, 또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일단 공안(貢案)에 등재되어 있으면 생산이 되던 되지 않던 이를 납부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공안에 수록되어 있으나 생산되지 않는 공물은 산지에 가서 비싼 값에 구입하여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해당 군현의 백성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에 대한 개정 논의는 역대 왕의 현안이 되었다. 이 때문에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임토작공의 원칙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경작지의 많고 적은 정도에 따라 쌀과 포를 거두는 형태가 일찍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서 기존의 공납제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각 군현의 전결 수를 헤아려 분정된 공물의 종류와 물량의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그 가격을 결정하는 사대동(私大同)·대동제역(大同除役)이 나타났다. 이는 공납제의 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공물가(貢物價) 징수의 확대·정착 과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