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공납의 ‘공(貢)’은 ‘토산물을 바친다’ 또는 ‘아래에서 위로 바친다’는 뜻이다. 공납은 크게 공물(貢物)과 진상(進上)으로 나눌 수 있다.
공물에는 원공물(元貢物)과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이 있다. 원공물은 지방의 각 관에서 준비하여 바치는 관비공물(官備貢物)과 각 관의 민가에서 거두어 상납하는 민비공물(民備貢物)이 있다. 종사하는 생업에 따라 민가에서 정역호(定役戶)를 정해 두고 특정한 물자의 규정된 양을 생산·포획·제조하여 상납하는 특수공물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물은 각 군현의 민가에서 거두어 납부하였다.
진상은 공물과 달리 각도 관찰사, 병마·수군절제사를 비롯하여 지방 장관이 왕에게 예물(禮物)로 바쳤다. 이것들은 주로 국가의 제사나 왕실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진상은 지방 장관이 자신이 관할하는 각 군현에 부과하여 이를 마련한 다음, 군수·현감 중에서 차사원을 선정하여 중앙에 상납하였다. 그 조달 방법은 공물과 거의 같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봉건적 부세제도의 하나인 공납은 각 지방의 토산물을 납부하는 것이므로 토지세인 전세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신역(身役)과 구별된다. 공납은 왕실과 중앙관청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각 지방에서 현물로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용]
조선전기 공납 품목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 책으로는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와 사찬 읍지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도총론과 일반 군현 항목에는 그 지역의 산물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도지리지』 도총론의 도복상공 항목에는 단지 창(槍)·각궁(角弓) 등의 무기류를 비롯하여 철(鐵)·짐승의 가죽[獸皮]·돗자리[席子]·포물(布物)·해산물·과실 등 모두 59종의 물산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반면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은 4항목으로 세분되고 각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물산의 종류도 『경상도지리지』 도총론에 비해 훨씬 많다.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4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각 도별 물산을 보면 함경도·평안도는 130여 종, 경상도·전라도·황해도는 280여 종 이상에 달한다. 이들 물산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약재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부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물목은 벼·보리·콩·기장·조 등의 곡물류, 참기름[芝麻油]·들기름[蘇子油]·향유(香油)·꿀[蜂蜜]·황납(黃蠟) 등의 유밀류, 백저포(白苧布)·면포·명주·저포(苧布)·정포(正布) 등의 포류, 그 밖에 말장(末醬)·개자(芥子) 등이다. 궐부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곡물류·포류·유밀류는 전세조공물로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공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물목은 과실류, 광물류, 목재류, 임산물류, 수산물류, 모피류, 금수류, 지물(紙物)·돗자리[席子]·기물(器物)·문방구류 등 수공업 제품과 그 원료, 농업 생산물, 병기(兵器) 및 선박 등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일반 군현의 토산 항목에는 금·은·동·철·주옥(珠玉) 등의 광산물, 종류가 가장 많은 수산물, 송이·산개(山芥)·지초(芝草) 등의 임산물, 밤·배·모과 등의 과실, 여우 가죽[狐皮]·쥐 가죽[鼠皮]·담비 또는 수달의 가죽[獺皮] 등의 짐승 가죽 등이 수록되어 있다. 토공 항목에 수록된 물종은 토산 항목에 수록된 물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토의 항목에는 곡물류, 과실류, 수공업 원료 및 기타 물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물종은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부 항목에 수록된 물종과 겹치는 것이 많다. 실제로 벼·보리·콩·기장·조 등의 곡물류와 목면·마포 등의 포류, 지마(참기름) 등의 유밀류는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부 항목과 군현의 토의 항목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토의 항목의 물목은 해당 지역에서 경작하는 데 적합한 작물을 말하는 것이지 전세조공물로 납부된 것은 아니었다. 벼·보리·콩·기장·조 등의 곡물류와 목면·마포 등의 포류는 전세조공물로 납부하기도 하였으나, 공물로도 납부하였다. 가령 1469년(예종 1) 6월 공조판서 양성지(梁誠之)의 상서에 의하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는 면포, 평안도·황해도에서는 명주, 함길도(咸吉道: 현 함경도)·강원도에서는 상포(常布), 충청도의 임천·한산에서는 생모시[生苧]를 공물로 납부하고 있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진상 물품은 짐승류·어류·조류·채소류·과실류·기구류를 비롯하여 모피·의료, 그리고 기타 장식품 등이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필요한 물품을 가능한 한 공물과 진상을 통하여 현물로 직접 거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점차 현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기보다는, 농민들이 소유한 땅의 많고 적은 정도에 따라 징수하는 형태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공납제 운영 원리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공물·진상은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부터 1결당 쌀[白米] 12두(斗)씩을 징수하고, 이를 중앙 각사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 물품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전기 현물 위주의 공물상납은 일부 진상물이 남아 있기는 하였으나 대부분 공인들을 통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