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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391년(공양왕 3) 5월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관리들을 18등급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왕자·부마·종친과 전·현직 관리, 임시직 관리에게 차등 있게 과전을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였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가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당사자가 죽더라도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경기에 있는 전지(田地)에 한해 수조지(收租地)로 지급해 주었기 때문에 새로 관직에 제수되는 사람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과전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전의 1/3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옮겨 지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전의 불법 점유를 막기 위해 진고체수(陳告遞收)의 규정을 마련하고,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바꾸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전의 부족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편 과전의 수조권자[田主]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조세를 거두어들이면서 경작자[佃戶]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1466년(세조 12)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직전(職田)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1470년(성종 1)에는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職田稅)를 거두어 해당 현직 관료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에 들어서는 국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직전을 사실상 폐지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이성계 일파는 1388년(우왕 14) 6월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민생 안정과 국용(國用)·군자(軍資)의 확보를 명분으로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조준(趙浚) 등의 상소로 시작된 전제개혁 운동은 이행(李行)·황순상(黃順常)·조인옥(趙仁沃)·허응(許應) 등이 가세하면서 마침내 1391년(공양왕 3) 5월에 과전법이 공포되었다.
새로 정비된 과전법의 규정에 따라 현직 관리뿐만 아니라 퇴직 관리, 임시직 관리까지도 과전의 지급 대상이 되었다. 모두 18등급으로 구분하고 10~150결을 차등 있게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였다.
[내용]
조선건국 후 1394년(태조 3)에는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의 이름만 부여한 첨설직(添設職)에게도 모두 실직(實職)에 준하는 과전을 지급하였다. 과전의 지급 대상은 이들뿐만 아니라 왕자·부마(駙馬)·종친 등도 포함되었다. 왕자, 왕의 형제, 왕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伯叔]로, 대군(大君)에 봉해진 자는 300결, 군(君)에 봉해진 자는 200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부마로서 공주의 남편[駙馬尙公主者]은 250결, 옹주의 남편은 150결을 지급하였으며, 그 밖의 종친도 등급에 따라 각각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세종실록』 8년 1월 27일]. 이러한 과전 지급 규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소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죽더라도 아내가 수절할 경우에는 수신전의 명목으로, 아내가 죽고 자식들이 어릴 경우에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휼양전의 명목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과전이 세록(世祿)으로서 지급된 전지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단순히 관리로서 직무에 대한 대가 차원이 아니라 대를 이어 관리로서의 신분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 신료들은 과전을 왕이 자신들에게 “영구히 하사해 준[永永賜與]” 것이라고 여겼다[『세종실록』 1년 9월 19일].
사전경기(私田京畿)의 원칙에 따라 과전은 공신전 등과 마찬가지로 경기의 전지로만 지급하였다. 1402년(태종 2) 2월 무렵 과전의 총 지급 결수가 8만 4,100여 결로, 경기도 전체 전지 면적의 56%를 넘어섰으며[『태종실록』 2년 2월 5일], 전국 전지 면적의 약 10%에 달하였다. 그러나 사전경기의 원칙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새로 관직을 수여받는 사람에게 줄 과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1417년(태종 17)부터 1431년(세종 13) 사이에 과전의 1/3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下三道]로 옮겨 지급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임시적인 조치였을 뿐, 그 뒤로도 직전법(職田法)이 실시될 때까지 과전은 경기도에 국한하여 지급되었다.
과전 운용상의 또 다른 문제점은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과전을 서로 맞바꾸거나[相換] 번갈아 가면서 전조(田租)를 거두는[遞收] 데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토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수확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옥한 토지를 자신의 과전으로 지급받고자 하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미 지급받은 과전을 좀 더 비옥한 곳으로 옮기고자 요청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상환은 쉽지 않았지만,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자신의 사유지 위에 설정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더욱이 윗대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과전은 그 자손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과전을 자신의 사유지 위에 지급받거나, 윗대의 과전을 그대로 물려받거나, 본인의 과전을 가족들이 수신전·휼양전의 명목으로 물려받는 경우에는 사실상 은점(隱占)에 의한 세습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국가가 그것을 환수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물론 과전법에는 은점을 막기 위해 진고체수(陳告遞收)의 규정을 마련해 두었다. 이는 은점한 과전을 먼저 신고하는 사람에게 그 과전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규정이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환수해야 할 과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고체수는 과전의 지급과 환수를 공평하게 하고자 했던 입법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들의 규정 위반이나 사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풍조를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여러 해 동안 관리로 복무하거나 새로이 관리가 된 사람들 가운데 과전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국가는 사망한 사람의 과전을 신고한 사람에게 그 전지를 과전으로 지급하되, 신고자가 과전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많은지 적은지를 살펴서 지급액을 정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이 진고하는 대신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의 친족이 진고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환수한 과전을 지급할 때에도 호조(戶曹)가 직접 맡아서 주관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23일][『세종실록』 11년 9월 30일]. 그 결과 과전에 대한 개인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국가의 지배력은 강화되어 갔다.
1431년(세종 13)부터는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즉, 1품부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까지를 1등으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부터 종4품까지를 2등으로, 5·6품을 3등으로, 참하(參下)를 4등으로 구분하였다. 말하자면 당상(堂上)·당하(堂下)·참상(參上)·참하로 구분하여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3년 1월 30일].
그러나 국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전의 은점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관리들에게 3년마다 과전단자(科田單子)를 받아 그사이 바뀐 내용을 수정하고자 하여도 원안(原案)이 분명하지 않거나 단자를 바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증빙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세종실록』 7년 7월 15일]. 모든 관리들은 가능한 한 선대 이래로 과전을 계속해서 이어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수신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거나, 휼양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도 몰래 숨겨서 전조를 징수하거나 부모가 사망한 뒤에도 바꾸어 받지 않고 그대로 전조를 징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세조실록』 8년 5월 27일]. 이렇듯 과전을 지급받을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과전을 은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관리가 되는 사람들에게 지급할 과전은 점점 부족해져 더욱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변천]
고려말 전제개혁 이후 국가 수세지나 개인 수조지를 막론하고 1결당 평상년(平常年) 수확의 평균 1/10에 해당하는 30말[斗]을 징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해마다 농사의 작황이 달랐기 때문에 답험손실(踏驗損實)을 통해 징수량을 다시 조절하였다. 그런데 국용전(國用田)·군자전(軍資田)과 같은 국가 수세지는 국가의 공적인 경로를 거쳐 답험손실을 했지만, 과전과 같은 개인 수조지는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田主]이 직접 답험손실을 하여 전조를 거두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전주는 손실(損失)의 정도를 지나치게 가볍게 책정하여 좀 더 많은 전조를 거두려 하였다. 예를 들면 1석[15말]을 거두어야 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23~24말을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과전의 경작자[佃客]를 상대로 전조 이외의 쑥[薦]·숯[炭]·장작[薪]·꼴[草]·행전(行纏)·말 먹이[馬糧]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물품들을 불법적으로 징수하여 경작자를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태종실록』 16년 5월 14일].
1416년(태종 16) 경기 지역의 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쌓였다. 국가에서는 이를 과전과 같은 사전(私田) 주인들의 횡포로 발생한 재해라고 하면서 이듬해부터 지방관을 통하여 사전에 대한 답험손실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태종실록』 17년 7월 22일].
더 나아가 세종은 공전과 사전은 모두 국전(國田)이므로 답험손실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기의 사전에 대한 답험손실을 법제화하였다[『세종실록』 1년 9월 19일]. 과전을 왕이 자신들에게 영구히 하사해 준 것이라는 양반 신료들의 주장은 공전과 사전이 모두 국가의 토지[國田]이기에 당연히 답험손실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명분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의 실시로 전국의 모든 경작지에 똑같은 전분(田分)과 연분(年分)의 기준이 적용되면서 이러한 원칙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로써 수조권을 매개로 한 전주의 과전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반면에 국가의 전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1466년(세조 12) 8월부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되었다[『세조실록』 12년 8월 25일]. 아울러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지급하던 수신전과 휼양전도 폐지하였다. 또한 직전의 지급액도 1등급의 경우 150결에서 110결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과전에 대한 답험손실권이 국가로 이관되고 직전법이 실시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조(田租)의 수취권은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과전을 경작하는 농민[佃戶]에 대한 전주의 횡렴은 여전하였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국가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1470년(성종 1) 직전세(職田稅)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다.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를 거두어 해당 전주에게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전주는 수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반면, 국가의 전지와 농민에 대한 직접 지배력은 더욱 확대·강화되었다.
1556년(명종 11)에는 거듭되는 흉년과 변경(邊境)의 소요 사태로 인해 군사비를 과다 지출하여 재정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이것을 내세워 사실상 직전을 폐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 박시형, 『조선 토지 제도사(중)』, 과학원출판사, 1961.
■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 연구: 토지분급제와 농민 지배』, 일조각, 1986.
■ 천관우, 『근세 조선사 연구』, 일조각, 1979.
■ 이경식, 「조선 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 『한국사연구』 28, 1980.
■ 朝鮮史硏究會 編,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朝鮮史における國家と民衆』, 朝鮮史硏究會,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