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공신전은 원칙적으로 자손에게 상속을 허용하였지만, 적서(嫡庶)의 차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경기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공신전을 지급하였지만, 공신이 늘어남에 따라 경기의 토지만으로는 모자라 다른 지방의 전지는 물론 둔전(屯田)까지 지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시적으로 수확의 1/150에 해당되는 전세(田稅)가 부과된 적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전세가 면제되었다. 조선후기 영정법(永定法)과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뒤에도 공신전에 대한 전세와 대동미(大同米)는 면제되었다. 다만 영조 때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면서 논밭의 주인에게 부담하게 한 결작(結作)은 납부하게 되었다.
[내용]
국가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이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공신은 왕과의 회맹(會盟)에서 충성을 다할 것과 자손 대대로 서로 친목할 것을 맹세하였다. 왕은 이들에게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작위(爵位)와 토지·노비 등을 지급하였고, 그 자손에게도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음직(蔭職)을 주었다. 이러한 공신들에게 지급한 토지를 공신전이라고 하였으며, 공신전은 사전(私田)으로 분류되어 상속이 허용되었다.
조선왕조의 경우 태조 때의 개국(開國)·원종(原從)·회군(回軍)·정사(定社) 공신, 태종 때의 좌명(佐命)·원종(原從) 공신 등 많은 공신을 책봉하면서 공신전이 2~3만 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1440년(세종 22)에는 개국·정사·좌명 공신의 경우에만 세습[子孫相傳]을 허용하였다[『세종실록』 22년 3월 21일]. 그렇지만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난(靖難)·좌익(佐翼) 공신이 책봉되었고, 계속해서 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 등이 책봉되어 세종 때 마련한 공신전의 제한적 세습 허용 원칙은 유명무실해졌다. 그 뒤에도 공신 책봉은 끊이지 않아, 1728년(영조 4)의 분무(奮武) 공신에 이르기까지[『영조실록』 4년 4월 29일] 무려 28차례나 공신 책봉이 있었다. 그렇지만 중종 때 이후에는 공신이 책봉될 때 공신전이 함께 지급되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공신전은 원칙적으로 자손에게 상속을 허용하였지만, 적서(嫡庶)의 차별을 인정하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로부터 제사를 이어받은 적손(嫡孫)이나 성을 이어받은 자손은 그대로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양첩(良妾)이나 천첩(賤妾)의 자손이 계승할 때에는 제사를 받들기 위한 제전(祭田)만 상속하도록 하고 나머지 공신전은 국가에서 환수하였다.
처음에는 경기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공신전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점차 공신이 늘어나면서 다른 지방의 전지는 물론 둔전(屯田)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시적으로 수확의 1/150에 해당되는 전세가 부과된 적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전세가 면제되었다. 조선 후기에 영정법(永定法)과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뒤에도 공신전에 대한 전세와 대동미(大同米)는 면제되었다. 다만 영조 때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면서 결작(結作)은 납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 이정수, 「조선 초기 공신전의 운영 양태: 조온 공신전권을 중심으로」, 『부대사학』 15·16,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