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왕실·중앙 기관·지방관청 등 각급 기관은 필요한 물건을 백성에게 바치게 하거나 시장에서 직접 매입하거나, 또는 상인을 통하여 조달하였다. 구매를 할 때에는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나 관아에서 책정한 가격을 이용하였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형성된 가격을 시가(市價)나 시가(時價)라고 하고, 관아에서 임의로 책정한 가격을 관가(官價)·절가(折價), 또는 상정가(詳定價)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중앙이나 지방의 각급 관청은 필요 물건을 구매할 때 대부분 상정가를 사용하였다. 상정가는 공인(貢人)에게 지급되었던 공가(貢價)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시가보다 높았다. 그러나 공가만 그러하였을 뿐 대부분의 중앙관청이 이용하는 상정가는 시가보다 낮았다. 특히 지방관청의 관가는 보통 시가보다 낮게 책정되었다. 이것은 현존하는 각 『읍사례(邑事例)』에 기록된 상정가를 시가와 비교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재정을 아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는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당시 시가는 관가의 2배 또는 3배나 되었다. 이 때문에 관아에서의 매입은 헐값에 억지로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납품업자들이 부담하는 매입비는 관청에서 지급한 액수를 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족분을 채우려고 판매자의 물품을 헐값으로 강제 매입하여 판매자들에게 손실을 끼치거나 첨가(添價)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추가로 거두어들여 백성들에게 부담을 떠넘기기도 하였다.
[변천]
낮은 상정가 때문에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피해를 입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동학 농민군은 상정가를 폐지하고 시가대로 구매해 주도록 주장하였다. 암행어사의 사목(事目)에도 무역할 때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행위를 단속하라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헐값을 버리고 시가를 따르도록 한 지방의 염찰 활동 결과가 별단(別單)으로 중앙에 보고되기도 하였다.
목민서(牧民書) 저술자들도 중앙 기관의 공물 사례와 같이 지방관청의 관물 무용가(貿用價)를 넉넉하게 정하여 아전들이 원망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세기 말 『읍지(邑誌)』에 의하면,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경상도 예안현은 상정가를 계사년에 혁파하고 시가대로 구매하도록 하였다. 전라도 고창현은 옛날에는 각 물품에 관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시가에 따른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한우근, 『동학란 기인(起因)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에 대한 일고찰」, 『전남사학』 10,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