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관부의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역군은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각자 마련하여 지참하였다. 먼 곳에서 징발된 역군은 흔히 조량목으로 면포를 준비하여 역소 주변에서 쌀인 역량(役糧)과 교환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민간에서 시장 거래에 쓰던 추포(麤布)의 한 가지를 조량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년 9월 12일].
[연원 및 변천]
부역 노동에 징발된 역군들은 부역 기간에 사용할 역량을 스스로 준비해서 지참해야 했다. 요역 노동에 징발된 연군(烟軍)이나 승역(僧役)에 징발된 승군은 역량을 대신해서 면포를 휴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량에 충당하기 위하여 준비한 면포를 조량목이라 불렀다. 조량목은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먼 곳의 역소까지 들고 올 수 있었다.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연군·승군 등은 공사장 주변에서 각자 준비한 조량목으로 곡물과 교환하는 일이 많았다.
17세기 이후 승군은 부역 노동의 일환으로 산릉역 등에 징발된 일이 많았다. 승군은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각자 마련하여 지참하였다. 예컨대 산릉역에 승군을 징발할 때, ‘스스로 역량을 준비하여 1개월 동안 부역하도록 한다.’는 조건은 오랫동안 지켜 온 전례(前例)로서 산릉역이 있을 때마다 도감사목(都監事目)에 포함되는 기본 사항이 되었다. 조량목을 비롯한 각종 경비는, 승군이 소속된 사찰에서 공동으로 부담하여 마련되었다. 산릉도감에서 역소에 도착한 승군을 점고할 때, 부역 기간인 1개월분의 역량을 지참하였는지 점검하였다.
[형태]
조량목은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역군이 역량을 대신하여 지참한 면포를 지칭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추포의 한 가지이자 시장에서 교환 수단으로 쓰던 상목(常木)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상목은 길이나 너비가 매우 짧으며 거친 면포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652년(효종 3) 창덕궁·창경궁의 건축 공사에 징발된 승군들은 관례대로 조량목을 들고 왔다. 그러나 당시 나라에서는 화폐 통용정책을 추진하여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할 때에는 반드시 화폐를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때문에 조량목으로 미곡을 구입할 수 없었던 승군은 양식이 떨어져 간다고 호소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평시서로 하여금 별도의 시장을 열게 하여 승군들이 싼 값에 미곡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