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대동법 이후의 요역은 공식적으로는 몇 가지 분야에만 한정되어 유지되었다. 하나는 지방관청의 일상적인 업무에 필요한 관수잡물(官需雜物)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이에 지방 재정의 운영을 원활히 하고자 현물화된 잡역세(雜役稅) 징수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실제로 잡역세는 대동법 이후 농민들이 부담하던 물납(物納)화 된 연호잡역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른 하나는 중앙정부에서 비정기적인 방식으로 긴급하게 차역(差役)하게 되는 산릉(山陵)의 요역과 중국에서 오는 사신의 접대와 관련된 요역 등이었다. 특히 산릉과 사신 접대는 모두 국가적 대사로 단기간에 많은 인력과 각종 잡물이 필요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2가지 모두 일찍부터 민간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요역 종목으로 인식되어 왔다. 대동법 성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 요역 종목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 주목받았으며, 결국 백성의 노동력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역사로 간주되었다. 그 밖에 일부 요역 종목이 남아서 그대로 민가의 부담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대동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각사[京司]나 병영·군문[營門]에서 군현에 분정[卜定]하거나 물품을 별도로 청구[求請]하는 방식으로 진상(進上)·각사공물(各司貢物)·칙사(勅使)·능역(陵役)·연회(宴會)·국혼(國婚)·제사(祭祀)·공해(公廨) 건축·사객(使客)·쇄마(刷馬)·기타 영읍수(營邑需) 등에 필요한 각종 현물과 인력이 조달되었다. 그로 인한 민간의 부담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잡역은 대부분 전결과 가호에 따라 결역(結役)과 호역(戶役)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었다. 따라서 대동미를 납부하는데도 불구하고, 군현민들이 결역과 호역으로 추가 부담해야 할 잡역은 번잡하고 무거웠다.
예컨대 1750년(영조 26) 지돈녕 이종성(李宗城)은 황해도·함경도에서 연호의 역[烟戶之役]이 무거워서 거의 전결세보다 많은 형편이라고 지적하였다[『영조실록』 26년 6월 22일]. 그에 따르면, 당시 경기도에서도 치계(雉鷄)·시초(柴草)·빙정(氷丁) 외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을 접대하는 데 역군이 필요하였다. 또한 상장(喪葬)에 필요한 담지군(擔持軍)·잡색군(雜色軍), 묘를 조성할 역군과 사초군(莎草軍)도 필요했는데 돈으로 대신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연호잡역은 가장 헐하다고 한 곳도 1년에 호당 40~50문(文) 이상의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요역 종목 가운데 대동세 상납미의 용도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는 산릉역(山陵役)이나 조사역(詔使役)과 같은 국가적 대역사가 있었다. 그 밖에 상납우마견군역(上納牛馬牽軍役)과 같이, 대동법 실시 전부터 제주와 지방의 여러 목장에서 상납하던 우마(牛馬) 몰이꾼인 견군(牽軍)을 민간에서 차출하는 요역 종목이 있었다. 예장담군(禮葬擔軍)의 역, 관청 공문인 관문(關文)을 전달하는 심부름 등은 각 군현의 경계에서 연군(烟軍)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부과하는 요역이었다. 『대동사목(大同事目)』에서는 이와 같은 요역 종목들을 모두 노동력 징발의 요역 노동의 형태로 존속시킨다고 규정하였다.
연호잡역은 지방별로 불균등하게 운영되었다. 다른 읍보다 과다한 잡역을 부담하고 있던 지방에서는 감면하거나 다른 고을로 옮겨 주기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지방관에 의한 부과 과정에서 불공정한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군병·군관·향리·관노비·역졸 등 유역인(有役人)은 연호잡역의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또 향임(鄕任)과 사족(士族)들도 세력을 동원해서 면제될 수 있었으며, 부민(富民)들은 뇌물을 써서 벗어나는 일이 많았다. 반면에 의지할 데 없고 가난한 하층민들만 연호잡역을 부담하였다. 18세기 말엽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의 경우 연호잡역의 응역자가 전체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변천]
조선후기 연호잡역의 부담이 증대하자 범위와 수량·역의 값[戶役價]을 일정하게 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호역(戶役)에 대한 각 읍의 규례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전국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지방관이 거두는 잡역은 점차 잡역세의 형태를 취하였다. 19세기 말엽에는, 본래의 세금 종류[本色]대로 부과하는 연호잡역은 극소수만 존재하였고, 잡역세의 명목은 크게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