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수강재는 이극문(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세워졌다. 자경전(慈慶殿)을 영건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짜 산[假山]을 만들었는데, 1785년 이를 철거하고 그 우물을 파서 작은 건물[小齋]을 한 채 지었다. 원래 그곳이 태조 때의 수강궁 옛터이므로 수강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어제수강재상량문(御製壽康齋上樑文)」이 수록되어 있다. 수강궁 옛터에 강학을 위한 집을 짓는다고 뜻을 밝히고, 왕세자가 주연(冑筵)을 하고 학문의 기쁨을 맛보기를 원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 수강재는 왕의 서재나 왕세자 학문의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수강재의 조성은 1782년(정조 6)에 원자(元子)를 위해 조성한 중희당(重熙堂)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 및 용도]
수강재의 위치는 창덕궁의 중희당 동남쪽으로, 연영합(延英閤)의 남쪽, 시민당(時敏堂) 터의 북쪽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를 만나고 정사를 논의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무과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정조실록』 10년 2월 1일]. 1813년(순조 13)에는 1월부터 12월까지 거의 매일 이곳에서 주로 경서를 읽었다. 이때 『소학(小學)』, 『맹자(孟子)』, 『시전(詩傳)』,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의 책을 강론하였다. 1827년(순조 27)부터 1830년(순조 30)까지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 할 때 중희당을 대리청정의 정당으로 활용하고, 수강재를 별당으로 사용했다[『순조실록』 27년 2월 9일].
[변천 및 현황]
건립 이후 순조 연간까지 왕의 강학 장소로 사용되었다. 1847년(헌종 13) 무렵 수강재 서쪽으로 석복헌(錫福軒)과 낙선재(落善齋)가 건립된다. 낙선재는 옛 낙선당 터에 건립되었으며 헌종은 낙선재에 거처하였다. 석복헌과 낙선재가 조성되면서 수강재는 대비전이 거처하는 곳이 된다. 헌종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東闕圖)」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헌종 연간에 변화된 모습은 「동궐도형(東闕圖形)」에서 평면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정면 6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어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5단 쌓아 올렸으며, 수강재 서쪽 한 칸은 누각으로 만들어 연초루라는 현판을 따로 걸고 있다. 수강재 서편에 행각이 ‘ㄱ’ 자형으로 붙는데, 이곳에는 유호헌(攸好軒)과 도시관(都是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