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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인경궁은 광해군대에 거의 완공되었으나, 인조대에 훼철되었다[『인조실록』 3년 2월 26일]. 창건 당시에는 이궁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경덕궁보다 큰 규모로 건축하였으나 소실된 창경궁과 창덕궁의 재건을 이유로 대부분이 헐렸고, 그 이후의 각종 공사에도 인경궁을 철거하여 사용하는 일이 잦아서 영조대 가서는 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영조실록』 45년 11월 18일].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에 왕이 정식으로 임어하는 궁궐은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구분한다. 하나의 궁궐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옮겨갈 궁궐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한 경복궁 외에 태종대 창덕궁을 창건한 이래 법궁과 이궁 체제는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경복궁이 우선 복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경복궁이 법궁이고 창덕궁이 이궁이던 체제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은 선조대부터 복구를 시작하여 광해군 즉위 후 완공되었고 이어서 바로 창경궁 중건에 들어갔다. 창덕궁이 완공되었지만, 광해군은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이 폐위되었던 창덕궁으로 가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협소한 경운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간청으로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그리고 1617년(광해군 9)부터는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새로 짓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1월 18일].
창덕궁이 완공된 뒤에 바로 창경궁 공역을 시작하였지만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고 창경궁이 이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창덕궁이 경복궁에 비해 협소하기 때문에 창경궁과 연계하여 하나의 법궁으로 사용하려던 것이었다. 따라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완공되었어도 이궁이 더 필요하였는데, 이때 이궁으로 건축한 궁궐이 인경궁이다.
인경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영조대 일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영조가 왕세손 정조와 함께 육상묘(毓祥廟)에 전배한 후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영조실록』 45년 11월 16일]. 전작례는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제사를 국왕이 몸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육상묘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이며, 효장묘는 영조의 맏아들을 모신 곳이고 의소묘는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의 형을 모신 곳을 말한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영조가 그의 가족들의 사당을 돌아본 일인데, 그의 어머니와 왕위를 잇지 못하고 일찍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과 정조의 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이때 영조는 승지에게 명하여 인경궁의 옛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인경궁에서 승하하였다는 기록을 보고 인경궁 옛터를 찾아보도록 명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인왕산 아래 사직단의 왼쪽에 있었다는 정도만 확인하였다.
따라서 인경궁의 위치를 확인한 일이 육상궁과 창의궁에 행차했을 때 있었다는 것은 인경궁의 위치가 육상궁과 창의궁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경궁은 사직단과 인접해 있으면서 육상궁과 창의궁과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광해군대 인경궁을 짓는 과정에서, 궁궐 내부에 자리하는 관청이 인경궁뿐만 아니라 인접한 경덕궁도 함께 사용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로써 인경궁의 위치는 경덕궁, 즉 지금의 경희궁과 인접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경궁과 경복궁을 행각으로 이루어진 길로 연결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았을 때, 경복궁과도 그리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경궁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왼쪽, 경덕궁과 경복궁, 육상궁, 창의궁과 가까운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인경궁은 경복궁 서쪽, 사직단 위쪽에 있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 누하동 일대이다. 지금은 수많은 필지로 구획되어 궁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창건 당시에는 이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지었던 궁궐이다.
[변천 및 현황]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짓기로 결정하고 인경궁의 터를 보게 하였던 때는 1616년(광해군 8) 3월 24일이다. 하지만 이때 궁궐 공사가 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은 이듬해인 1617년(광해군 9)에 터를 잡게 되면서부터이다.
인경궁의 공사는 이전의 창덕궁처럼 기존의 터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므로 궁궐 담장을 건축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졌다. 1617년 4월 26일에는 도제조(都提調) 이하 중사(中使), 술관(術官) 등이 함께 모여 정전(正殿), 시사전(視事殿), 침전(寢殿), 별당, 야대청(夜對廳) 등의 조성 계획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도록 하였다. 그해 5월 15일에는 정전의 기초를 세웠고, 26일에 두 침전과 별당의 기초를 세웠다. 그리고 인경궁 공사가 미처 완성되지 않았을 때 광해군이 폐위되었다.
광해군이 인경궁 공사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인경궁 공사는 7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요 전각들은 이미 다 조성되어 있었다. 정전과 편전, 침전, 별당, 동궁 등이 완성되었고 관아와 후원도 대개 형성되었다. 폐위되던 해인 1623년(광해군 15)에는 인경궁으로 이어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인경궁은 사용되었다. 인목대비가 인경궁에 있는 초정(椒井)에 목욕을 하러 가고, 인조도 인목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 인경궁으로 거둥한 기록이 『인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1632년(인조 10) 6월에는 인목대비가 인경궁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생을 마쳤다[『인조실록』 10년 6월 28일].
하지만 인경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되어 다른 궁궐을 짓기 위한 자재로 사용되었다. 1633년(인조 11) 3월, 인경궁을 철거하여 창덕궁을 재건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은 인경궁을 수리하는 폐단이 뜯어다 옮겨 짓는 것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서 인경궁의 철거 이건을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을 철거 이건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다[『인조실록』 11년 3월 25일].
인경궁을 철거하여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은 후에도, 효종과 현종대에 걸쳐 인경궁의 초정에 목욕하러 가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영조대에는 인경궁이 빈터만 남아 정확한 경계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형태]
인경궁의 정문은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2층으로 건축되었고 같은 시기에 건축한 경덕궁의 정문은 이와 위계를 달리 하기 위해서 단층으로 하였다. 정전인 홍정전(弘政殿)은 창덕궁으로 이건하는 과정에서 그 실체를 알기 어렵게 해체하여 옮겨지었으며, 지붕에는 청기와를 이었다.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은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으로 거의 그대로 이건하였는데 동일하게 9칸 규모에 청기와 건물로 건축하였다.
인경궁에는 규모가 같은 두 침전을 지었는데 규모는 대조전(大造殿)을 따라서 지었다. 인경궁에 있던 두 개의 침전은 광해군이 직접 보고 받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인경궁의 두 침전을 건축할 때 고주(高柱)는 19자, 중고주(中高柱)는 16자, 평주(平柱)는 10자짜리 기둥을 사용하였다. 보는 상보(上栿)가 21자, 중보(中栿)가 15자를 사용하고, 도리창방(道里昌防)은 정간(正間)이 12자, 변간(邊間)이 11자를 사용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24일]. 1656년(효종 7)에는 인경궁 침전이 모두 철거되어 없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효종실록』 7년 7월 21일], 1633년에서 1648년(인조 26) 사이의 공사에서 철거되었거나 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공사로 인해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인조대에 있었던 이건 공사에서 침전을 복구하기 위해 철거한 것은 청와전(靑瓦殿)과 경수전(慶壽殿)이다. 경수전은 45칸 건물이며 철거하여 창덕궁 대조전을 복구하였다. 청와전은 36칸 건물인데 이름으로 보아 청기와 지붕을 했던 건물로 보인다.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을 짓기 위해 철거하였다.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는 창경궁의 세자궁을 짓기 위해 인경궁의 세자궁을 헐어서 옮겨지은 기록이다. 이 책을 통해 인경궁에서 세자를 위한 전각으로 승화전(承華殿)이 있었고 저승전(儲承殿)으로 이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사는 1647년(인조 25) 8월부터 1648년 7월까지 약 1년 동안 이루어졌다. 45칸이었던 인경궁의 승화전이 28칸의 저승전으로 되어 이건 과정에서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초기에는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과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에 청기와를 씌웠는데 그 내용은 문종대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연산군대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에 청기와를 이도록 전교한 기록이 있다. 이후 중종이 근정문, 흥례문(興禮門), 광화문(光化門)과 경회루(慶會樓)의 지붕도 청기와를 올리자고 건의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는 이 전각들의 위계가 정전이나 침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청기와는 전각의 위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청기와 장인 박용수를 마지막으로 청기와 굽는 기술이 단절되었다. 광해군대에는 인경궁을 지으면서 청기와와 황기와 굽는 법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였고 기술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경복궁의 예처럼 인경궁을 지을 때 정전인 홍정전(弘政殿)과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에 청기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