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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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弘濟院)

서지사항
항목명홍제원(弘濟院)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원(院)
관련어교통(交通), 민충단(愍忠壇), 벽제관(碧蹄舘), 사대(事大), 역참(驛站), 외교(外交)
분야문화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한양 서북쪽에 위치한 교통 시설 중 하나인 원(院).

[개설]
홍제원(洪濟院)은 985년에 만들어진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명나라 및 청나라 사신이 한양을 들어서기 전에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연려실기술』 「지리전고(地理典故)」에서 “홍제원은 사현 북쪽 들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하고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서울에 오는 날에는 그 정자에서 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뒤에 정자가 없어지니, 지금은 중국 사신이 홍제원에서 쉰다. 순치(順治) 무자년(1648)에 고쳐 세웠으며, 조사(詔使)조에 있다.”고 하였다.

원(院)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지닌 교통 편익 시설로서 주로 고려의 사찰에서 파생되었다. 공간 구성은 여행자의 숙박을 위한 온돌방과 주방, 마필을 위한 마구간 등이 있고 공(公)과 사(私)의 구별, 신분 차의 구별, 남녀의 구별 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속 건물로는 누(樓)와 정(亭)이 있고 이들 건물에는 단청을 칠했다.

[변천 및 현황]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홍제원은 985년(고려 성종 8)에 정현(鼎賢)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들어서 최초로 등장하는 홍제원의 기록은 정종대에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명나라 수도에 보내면서 임금이 직접 홍제원에서 전송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홍제원은 명나라 혹은 청나라와 관련된 사신의 영접과 전송,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돌아오는 신하의 영접과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의 북쪽 지역에서 한양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벽제관(碧蹄館)을 거쳐 홍제원을 지나야만 한양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조에 많은 원이 관리가 부실하여 쇠락해 있었지만 홍제원의 경우는 밭 2결(結) 50부(負)를 소속시켜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세종실록』 7년 11월 20일]. 사신 영접이 이뤄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홍제원에 홍제원정(洪濟院亭)이라는 정자가 부속되어 있어 이곳에서 영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세종실록』 10년 9월 17일].

역사상 홍제원은 교통 시설의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홍제원은 굶주린 백성을 위한 진휼을 담당하기도 했다. 1435년(세종 17)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편안히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양 동쪽의 보제원(普濟院)과 서쪽의 홍제원에 나누어 머물도록 한 일이 있고[『세종실록』 17년 8월 2일], 1437년에도 보제원과 이태원(利泰院)에 설치한 진제장(賑濟場)이 부족해서 홍제원에 설치한 일이 있다[『세종실록』 19년 2월 16일]. 이후에도 홍제원에는 수차례에 걸쳐 진제장이 만들어졌다. 1445년에 설치한 진제장의 상황이 『세종실록』에 전하는데 “보제원의 기민(飢民)이 67인, 동활인원이 90인, 홍제원이 70인, 서활인원이 48인인데 계속해서 모여든다.”고 했다[『세종실록』 27년 1월 30일]. 이 당시 보제원과 홍제원에는 흙집[土宇] 2칸씩밖에 없어 기민 수용이 불가능해 원사(院舍)를 늘리기도 하였다.

홍제원이 언제 사라지게 되었는지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병자호란 중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643년(인조 21)에 청나라 칙사가 한양에 들어올 때 벽제관에서 잠을 자고 야밤에 달려 들어오므로 폐단이 많으니, 홍제원 옛터에 관사를 설치하여 벽제에서 점심을 먹고 홍제원에 와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한 내용에서 이런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인조실록』 21년 10월 12일]. 결국 1648년에 청나라 칙사의 요청으로 홍제원에 참(站)을 설치하고, 홍제원을 다시 짓게 하였다[『인조실록』 26년 3월 10일]. 원래는 태평관(太平館)을 옮겨 지을 예정이었는데, 태평관을 살펴본 결과 61칸 가운데 23칸은 이건이 가능하지만 38칸은 썩어서 이건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인조는 인경궁(仁慶宮)의 남은 아문(衙門) 한 곳을 헐어 태평관과 더불어 옮겨 짓게 하였다. 이후 홍제원은 고종대까지 계속 유지되었지만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홍제원 인근에는 임진왜란 시 전몰한 명나라 군사들을 위한 민충단(愍忠壇)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김종헌, 「한국교통건축의 변천과 발달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