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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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城門)

서지사항
항목명성문(城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성곽(城郭)
관련어광희문(光熙門), 군문(軍門), 군영(軍營), 도성(都城), 돈의문(敦義門), 동소문(東小門), 서소문(西小門), 수문(水門), 숙청문(肅淸門), 숭례문(崇禮門), 창의문(彰義門), 한양(漢陽), 흥인지문(興仁之門)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궁궐과 행정기구 민간 거주지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성곽의 문.

[개설]
조선 건국과 더불어 한양의 도성이 만들어졌고, 도성에는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사대문이 운영되었으며, 소문(小門)으로 동소문(東小門), 서소문(西小門), 광희문(光熙門), 창의문(彰義門)의 사소문이 운영되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 건국과 더불어 한양의 도성이 만들어졌고, 도성에는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청문의 사대문이 운영되었으며, 소문으로 동소문, 서소문, 광희문, 창의문의 사소문이 운영되었다. 동소문은 홍화문인 혜화문으로 혜화동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소문은 중구 서소문동 중앙일보사 본관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희문은 중구 광희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창의문은 종로구 청운동 북악산 산간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및 현황]
한양 성곽의 사소문은 1396년(태조 5)에 한양 성곽의 완성과 더불어 만들어졌다. 동소문인 혜화문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처음에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했다가 1511년(중종 6)에 이름을 고쳤고, 조이(趙履)가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바꾼 이유는 1483년(성종 14)에 성종이 창경궁을 짓고, 궁의 정문을 같은 이름인 홍화문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조선초에 만들어진 문루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혜화문은 문루가 없이 방치되다가, 1744년(영조 20)에 영조가 문루를 건립하고 편액을 걸게 했다.

수구문(水口門)인 광희문과 관련해서는 유독 풍수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전한다. 조선초에는 광희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이 적어서 인가를 늘리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풍수가의 말에 따르면 수구(水口)에는 인가가 빽빽하게 많이 있고, 창름(倉廩)이 많이 쌓여 있어야만 산수의 기운이 머무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구문 밖은 도둑들의 소굴로 어두운 밤에는 사람이 다니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인가가 들어서기에는 부적합하였다. 광희문의 문루가 언제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사료가 미흡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문루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문루가 만들어진 것은 1711년(숙종 37)에 이르러서였다. 이때 다시 수구문을 개설하고 장차 문루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이후 바로 문루를 조성했지만 따로 편액을 걸지는 않았고, 1719년(숙종 45)에 ‘광희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숙종실록』 45년 1월 25일]. 1744년(영조 20)에는 광희문에 단청을 한 일이 있고, 1864년(고종 1)에는 광희문을 수리하였다.

서소문은 원래 소덕문(昭德門)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소덕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례는 극히 적고 대부분 서소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738년(영조 14)에 이르러 소덕이라는 글자가 예종 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의 휘호와 같다는 영조의 지적에 따라 소의문(昭義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서소문에는 따로 문루가 없다가 1744년(영조 20)에 문루가 완성됐다. 소의문의 현판은 서종옥(徐宗玉)이 쓰도록 했다[『영조실록』 20년 8월 4일].

창의문과 관련된 문헌자료에 장의문(藏義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장의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초에만 등장하는 명칭이다. 사료의 부족으로 장의문이 창의문의 별칭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743년(영조 19) 5월 19일에 기록된 『승정원일기』에서 장의문(壯義門)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기록에는 “홍익삼(洪益三)이 말하기를, 장동(壯洞) 사람에게 들으니 처음에는 장의문이라고 했다가 인조 때 거의(擧義) 후에 창의문으로 고쳤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장의문과 창의문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창의문은 1741년(영조 17)에 인조반정의 의군이 이곳을 경유했기 때문에 개수해야 한다는 훈련대장(訓鍊大將) 구성임(具聖任)의 의견으로 개수했고, 개수가 진행되면서 창의문에 누각도 같이 세웠다[『영조실록』 16년 8월 1일].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도시계획에 따라 사라지게 된 후, 혜화문과 광희문은 인근 자리에 복원하였고, 창의문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시대 한양의 성곽이 외적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일은 없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나 이괄의 난 때에 국왕이 도성을 탈출하여 도성을 방어처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숙종 이후부터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 전략이 세워지면서 도성은 국왕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거점이 되었고 성곽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영조대 군영에 의한 도성 방어 체계가 완성된 후에는 도성의 성곽을 군영에서 분담하여 개수하고 방어하였다. 따라서 각 성문의 관리와 방어도 군영에서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7.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