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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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德弘殿)

서지사항
항목명덕홍전(德弘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운궁(慶運宮)
관련어경효전(景孝殿), 대한제국(大韓帝國), 덕수궁(德壽宮), 외교(外交), 의례儀禮, 이왕직(李王職),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일제시대 덕수궁의 알현실로 조성된 건물.

[개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12월 2일].

[위치 및 용도]
덕홍전은 경운궁 내 함녕전(咸寧殿) 서쪽, 중화전(中和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경효전이라고 하여 혼전의 제례에 이용하였으나, 나중에 덕홍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알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용도로 건립되었다. 경효전은 명성황후의 전호(殿號)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돌아가시자 최초로 정해진 시호는 순경(純敬), 전호는 덕성(德成),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당시 빈전(殯殿)은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으로 정했고, 혼전(魂殿)은 경복궁 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의 장례를 바로 진행하지 않았다. 1896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경운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왕비를 위한 빈전으로 경복궁의 경소전(景昭殿)을 경운궁에 이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9월 4일에 왕비의 시신을 경복궁 태원전에서 경운궁 경소전으로 옮겨 모셨다. 또한 1897년(고종 34) 1월 6일에는 왕비의 시호, 능호, 전호를 모두 새롭게 교체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개칭하였고, 3월 2일에 시호를 다시 명성(明成)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왕비의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고 대신 조선이 황제국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었으며[『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빈전에 나아가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였고, 명성황후의 국장은 1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은 이미 경소전으로 정해져 있었고, 우주(虞主)를 봉안한 이후 경효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경효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 역시 소실되었다. 화재 직후 명성황후의 우주는 준명전(濬明殿) 서행각에 임시 봉안하였고, 후에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수풍당이 경효전이 되었다.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경소전이 위치하고 있던 곳에는 원래 모습대로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건물명을 경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건된 경효전은 동쪽에 4칸의 이안청(移安廳), 서쪽에 4칸의 중배설청(中排設廳)을 두었고, 정면에 내삼문인 융안문(隆安門)과 좌우 각 4칸의 행각을 두었다. 행각 밖에는 12칸의 어재실(御齋室)과 4칸의 숙목문(肅穆門)을 두었다. 또 숙목문 밖에는 25칸의 ㅁ자형 건물인 장방처소(長房處所)와 3칸의 돈례문(敦禮門)을 두었다.

경운궁 중건을 통해 다시 경효전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우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해지면서 고종 역시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명성황후의 우주는 계속 수풍당(綏豐堂)에 머물렀고, 고종이 서거한 이후인 1921년 3월 31일에서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효덕전(孝德殿))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었다.


그 와중에 경효전을 덕홍전으로, 즉 제례와 관련된 건물을 알현실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12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덕홍전의 준공’이라는 제목 아래 “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 되는 인정전(仁政殿)에 의거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낙성하여 6일 밤부터 점등하였는데 상세히 들은즉 공사비 6만여 원을 들여서 실내 장식과 다른 것들도 극히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더라.” 하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건물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내부 마감은 크게 변했다. 바닥은 혼전[경효전]에 적합하게 전(甎)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마루로 바꾸었다. 창호에는 커튼을 덧대어 설치했고 내부에 조명기구로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기존의 월대를 축소했고 진입 계단에 변화를 주었으며 동쪽의 함녕전, 서쪽의 귀빈실과 통행할 수 있도록 복도각을 설치했다. 현재도 복도각과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서양식 판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덕홍전으로 변경되면서 경효전 건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경효전 주위의 부속 건물들은 크게 변했다. 경효전이 있을 당시에는 주변 건물들이 모두 제례와 관련된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새롭게 바뀐 것이다. 이때에는 기존 관제인 궁내부(宮內府)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이 들어선 시기였다. 덕홍전 공사가 진행되면서 덕수궁 소속 이왕직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찬시실, 귀빈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덕홍전 전면의 삼문은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다. 귀빈실과 덕홍전 전면의 행각은 현재도 경운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들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 기사에서는 “일선제도(日鮮制度)를 절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과 일본의 건축 기법을 모두 합한 건축물이라는 내용이다. 건축물 외형은 조선의 전통 양식을 따른 듯하지만 내부 구조체는 일본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보면 건축 외형이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입면 비례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형태]
덕홍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기둥은 방형기둥을 사용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의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홍전은 고종의 알현 장소였으므로 일제시대 총독과 고위 관료들의 신임 인사 및 외교사절들의 인사를 받던 곳이었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 이철원, 『왕궁사』, 동국문화사, 1958.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