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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호분위(虎賁衛)는 조선전기 중앙군인 용양위(龍驤衛: 左衛)·의흥위(義興衛: 中衛)·충좌위(忠佐衛: 前衛)·충무위(忠武衛: 後衛) 등과 함께 5위(五衛) 가운데 하나로 우위(右衛)에 배치된 군사이다.
조선의 중앙군은 고려말 진법에서 연유한 5군 체제의 전통을 이어 받아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설치되었다. 1401년(태종 1) 의흥삼군부는 승추부(承樞府)로 개칭되었고, 1409년(태종 9) 의흥부(義興府)로 재편되었다. 1432년(세종 14) 의흥부를 개칭하였다가 다시 진무소(鎭撫所)로, 문종대 오위(五衛)로 개편되었다. 1457년(세조 3) 병제 개혁에서 제색군사(諸色軍士)가 모두 오위에 분속됨에 따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체제가 완비되었다.
호분위의 조직 또한 중부(中部)·좌부(左部)·우부(右部)·전부(前部)·후부(後部) 체제로 편제되어 있는데, 중부는 도성(都城)의 서부(西部)와 평안도(平安道) 안주진관(安州鎭管)의 군사(軍士)가 편제되었다. 좌부(左部)는 의주(義州)·구성(龜城)·삭주진관(朔州鎭管) 및 창성(昌城)·창주(昌洲)·방산(方山)·인산진관(麟山鎭管)의 군사가 편제되었다. 우부(右部)는 성천진관(成川鎭管)의 군사가 편제되었다. 전부(前部)는 영변(寧邊)·강계(江界)·벽동진관(碧潼鎭管) 및 벽단(碧團)·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위원(渭原)·초산(楚山)·영원진(寧遠鎭)의 군사가 편제되었다. 끝으로 후부(後部)는 평양진관(平壤鎭管)의 군사가 편제되었다.
호분위 편대 가운데 족친위(族親衛)는 왕과 왕비의 친족인 종친으로 편성되었는데 시취(試取)와 무재(武才)와 거의 관련이 없고 정원의 규정이 없었다. 친군위는 함경도 출신 양반 가운데 선발되었는데 왕실의 정보기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인원은 40명이며 2교대로 1년간 근무하였다. 또한 팽배는 방패로 무장한 병종이 역졸로 전락된 군사로 이해된다. 그 인원은 5,000명이고 5교대로 4개월간 근무하였다.
조선전기 오위 체제는 임란 직전까지 체제는 유지되었지만, 군대의 질적 저하가 현저히 나타났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오위 체제는 군액과 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명목(名目)만 남아 있다가 1882년(고종 19)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