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 포도청과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 시간과 구역을 나누어 도성을 순찰할 때, 나누어진 순찰패(巡察牌)를 지휘하는 장교 혹은 국방을 위해 진영(鎭營)에 성을 축조할 때 공장(工匠)을 거느리는 사람
[내용]
조선후기 도성의 순찰은 삼군문(三軍門)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과 포도청(捕盜廳)에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을 선정하고, 8패로 구역을 나누어 순행하였다. 훈련도감은 초일(初日)인 인(寅)·신(申)·사(巳)·해(亥)일에 패장 8명과 군사 80명이 기찰하였다. 금위영은 중일(中日)인 자(子)·오(午)·묘(卯)·유(酉)일에 패장 8명과 군사 78명이 기찰하였다. 어영청은 종일(終日)인 진(辰)·술(戌)·축(丑)·미(未)일에 패장 8명과 군사 64명이 기찰하였다.
포도청은 좌우로 각 8패로 나누어 야순(夜巡)을 시행하였다. 포도청의 도성 내 순라는 좌변포도청이 동부(東部)·중부(中部)·남부(南部)를 관장하였고, 우변포도청이 북부(北部)·서부(西部)를 담당하였다. 포도청의 패장에는 군관(軍官)이 임명되었는데 좌포도청은 군관 8명과 군사 22명을 거느리고 기찰하였고, 우포도청은 군관 8명과 군사 16명을 인솔하고 순찰하였다. 군관인 8명의 패장은 각 군사 2~3명을 거느리고 순찰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강화도 등지에 축성이 이루어 질 때 군영의 장관(將官)이 축성 패장이란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