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중앙 군영(軍營)에 소속해 있을 경우에는 대체로 행군(行軍)하는 사이에 짐바리 운반에 활용하였다. 훈련도감(訓鍊都監)에는 1670년(현종 11)에 처음 두었는데, 스스로 말을 준비해서 수행할 자를 모집하여 모두 334명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번(番)을 면제하는 대신 스스로 먹여 기르게 하였다. 그 상세한 액수는 포수(砲手) 20초 2,440명으로, 1초에 122명인데 복마군은 9명이다. 살수(殺手) 6초 738명으로 1초에 123명인데 복마군은 9명이다. 제색표하군(諸色標下軍)에 복마군은 6명이 있었다. 그리고 금군(禁軍)의 경우 표하복마군(標下卜馬軍)은 12명, 가후복마군(駕後卜馬軍)은 4명이다. 번을 갈아드는 복마군은 70명인데 그 가운데 서자지[書字的]가 1명, 패두(牌頭)가 1명이다. 금위영(禁衛營)은 육도군보(六道軍保)의 정군이 15,925명인데 그중에 복마군이 1,125명이며, 어영청(御營廳)의 육도군보는 정군이 125초에 16,300명인데 그중에 복마군이 1,175명이었다. 양 영의 상번군(上番軍)에게는 보포(保布)를 감하고 여수전(旅需錢)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