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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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출신(局出身)

서지사항
항목명국출신(局出身)
용어구분용어용례
동의어무용청(武勇廳)
관련어훈련도감(訓鍊都監)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되어 입직(入直) 등을 담당하였던 병종(兵種).

[내용]
병자호란의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직후에 설치되었다. 피난 당시 임금을 호위하였던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3차에 걸쳐 실시했던 무과의 합격자 가운데 특별히 훈련도감 출신 1,374명으로 구성되었다. 급제한 뒤 일반 도감군과 구별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설치되었다. 설치된 해 12월부터 7국(局)으로 나뉘어 각각 별장(別將) 등의 통솔하에 영숙문(永肅門)에 입직하였다. 곧 무용청(武勇廳)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 후 재정 문제 등으로 궐원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1658년(효종 9)에는 4국으로, 다시 1663년(현종 4)에는 3국으로 줄어들면서 인원도 232명으로 감축되었다. 1676년(숙종 2)에 다시 도감군 중에서 무과 출신들이 매우 많은데 마땅한 입속처가 없어 불편하다며 3국에 소속시키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1국의 정원이 50명으로 정해지면서 총 150명의 규모를 유지하게 되었다. 1685년(숙종 11)에 각 국의 10명씩 모두 30명은 장용위(壯勇衛)의 무예(武藝) 출신으로 채우도록 했다. 하지만 1802년(순조 2)에 장용영(壯勇營)이 혁파되자 도로 3국으로 환속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용례]
上出御敦化門放榜 (중략) 訓鍊都監砲手 居其半焉 以仍隷編伍爲冤 至有上疏請免者 朝廷遂設七局以別之 砲手之出身者 稱以局出身 置局將以領之 [『인조실록』 15년 10월 2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金鍾洙, 『朝鮮後期 中央軍制硏究』, 혜안, 2003.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집필자] 윤훈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