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 영안도(永安道)의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와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에 설치한 토관서반(土官西班)의 위호(衛號).
[개설]
세종 중엽 이후에 두만강 유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른바 육진(六鎭)을 차례로 설치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진에 토관이 아울러 두어졌다. 그러나 주변 정세의 변동과 환경 및 지형 조건 등의 고려로 인하여 위치라든가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그로 말미암아 토관제도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1434년(세종 16) 처음 두어졌을 때 경원의 토관서반의 위호가 유원위(柔遠衛)였으며, 영북진(寧北鎭)의 그것은 회원위였다. 그 뒤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결국 경원과 회령의 토반서반 위호로는 회원위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34년(세종 16) 1월에 6진 가운데 경원과 영북진에 처음으로 토관을 설치하였다. 이때 각 품의 칭호를 기존에 이미 있었던 함흥토관(咸興土官)의 예를 그대로 따른다면 같은 도 안에 있는 세 곳의 토관 칭호가 모두 동일하게 되므로 혼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을 것으로 우려하였다. 또한 변진(邊鎭)에 관직을 신설하여 사기를 북돋우는 뜻도 없어진다면서 두 곳의 각 품 직명을 개정하였는데, 경원의 서반 위호는 유원위, 영북진은 회원위라고 하였다.
그런데 1434년 10월에 영북부(寧北府)를 도로 영북진으로 낮추고 그 대신 회령진(會寧鎭)을 부로 승격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것을 계기로 해서 회령부의 토관서반 위호가 회원위로 되었고, 영북진의 그것은 유원위로 바뀐 것 같다. 원래 애초의 계획에는 영북진의 토관 위호가 유원이었고 경원부의 그것이 회원이었다[『세종실록』 16년 1월 8일]. 하지만 막상 설치되었을 때에는 서로 바뀌었다. 그런데 영북진과 회령부로 되면서 원래의 계획대로 영북진은 유원위가 되었고 회령부의 그것은 회원위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경원부에는 유원위라고 하였다.
한편 부령(富寧)은 1449년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마침내 1451년(문종 1)에 토관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때 서반 위호는 회원위였으며, 그 사실은 1462년(세조 8) 토관서반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부령도호부의 서반 위호가 회원위였던 것으로 확인된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그 뒤에 경원은 회원위로, 부령은 유원위로 바뀌었으며, 이것은 『경국대전』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1462년(세조 8)에 토관서반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때 회령부 회원위의 경우에는 일령(一領)은 사직(司直) 1명, 섭사직(攝司直) 2명, 사정(司正) 1명, 섭사정(攝司正) 2명, 부사정(副司正) 1명, 섭부사정(攝副司正) 2명, 사용(司勇) 2명, 섭사용(攝司勇) 2명, 대장(隊長) 5명, 대부(隊副) 10명이고, 이령(二領)은 섭부사직(攝副司直) 3명, 섭사정(攝司正) 3명, 섭부사정(攝副司正) 3명, 섭사용(攝司勇) 4명, 대장(隊長) 6명, 대부(隊副) 10명이었다.
부령 회원위의 경우에는 일령(一領)은 부사직 1명, 섭부사직 1명, 사정 1명, 부사정 1명, 섭부사정 1명, 사용 1명, 섭사용 1명, 섭사용 1명, 대장 4명, 대부(隊副) 6명이고, 이령(二領)은 섭부사직 1명, 섭사정 2명, 섭부사정 2명, 섭사용 2명, 대장 4명, 대부 6명이다. 이 당시까지 경원의 서반 위호는 유원위였다. 그 뒤에 회원위로 바뀌었다.
[변천]
『경국대전』에 따르면 회령, 경원의 토관서반의 유원위는 정6품 여과(勵果)·종6품 부여과(副勵果)·정7품 여정(勵正)·종7품 부여정(副勵正) 각 1명, 정8품 여맹(勵猛) 2명, 종8품 부여맹(副勵猛) 3명, 정9품 여용(勵勇) 4명, 종9품 부여용(副勵勇) 5명으로 정해졌다.
[의의]
두만강 유역을 개척하기 위해 설치된 6진 가운데 회령, 경원 등의 2진에 두었던 토관서반의 위호로서 이주민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군사적인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