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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평안도(平安道)의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에 설치된 토관서반(土官西班)의 위호(衛號).
[개설]
세종 치세의 중반기 이후에 이른바 사군(四郡)을 차례로 설치하면서 압록강 중류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 사업을 착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압록강 유역의 요충지 일대에 도호부를 순차적으로 두기 시작했다. 그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 강계였다.
도호부 승격과 더불어 토관제를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42년(세종 24) 9월에 이르러 병조에서 강계부(江界府)의 토관에는 동반(東班)이 없어서 다른 고을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이로 인해 국가에서 그 지역 백성들을 위로하여 즐겁게 하는 방법이 고르지 못하니, 이조(吏曹)로 하여금 정원수(定員數)를 알맞게 정하여 동반을 설치하게 하여서 민심을 위로할 것을 청하여 임금에게 승낙을 얻었다[『세종실록』 24년 9월 21일]. 이로써 이 당시 토관서반은 확실히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 당시 토관서반의 위호는 진강위(鎭彊衛)였을 것이다. 이것은 1462년(세조 8)에 토관서반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의주(義州)와 더불어 강계의 토관서반의 위호가 진강위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그 뒤에 진포위로 바뀌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이 『경국대전』에 실리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42년(세종 24) 9월에 병조의 건의로 토관동반이 설치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전에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런데 그 당시 토관서반의 위호는 진강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1462년(세조 8)에 토관서반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의주(義州)와 더불어 강계의 토관서반의 위호가 진강위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조직 및 담당 직무]
1462년(세조 8)에 토관서반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강계 진강위의 경우에는 일령(一領)은 부사직(副司直) 1명, 섭부사직(攝副司直) 1명, 사정(司正) 1명, 부사정(副司正) 1명, 섭부사정(攝副司正) 1명, 사용(司勇) 1명, 섭사용(攝司勇) 1명, 대장(隊長) 4명, 대부(隊副) 6명으로 하고, 이령(二領)은 섭부사직 1명, 섭사정(攝司正) 2명, 섭부사정 2명, 섭사용 2명, 대장 4명, 대부 6명으로 되었다. 이때까지 강계의 토관서반 위호는 진강위였는데, 그 뒤에 진포위로 바뀌었으며, 그것이 『경국대전』에 실리게 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 따르면 강계의 토관서반의 진포위는 정6품 여과(勵果)·종6품 부여과(副勵果)·정7품 여정(勵正)·종7품 부여정(副勵正) 각 1명, 정8품 여맹(勵猛)·종8품 부여맹(副勵猛) 각 2명, 정9품 여용(勵勇) 3명, 종9품 부여용(副勵勇) 5명으로 정해졌다.
[의의]
사군의 설치 등을 통해서 압록강 중류 유역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계는 바로 그 중심에 위치했던 전략 요충지로 매우 중시되었다. 이에 토관서반으로서 진포위를 두어서 주민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군사적인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