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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가매장 형식으로 광(壙)을 본떠 만들어서 대렴 직후에 왕과 왕후의 재궁(梓宮)을 안치하는 상구(喪具).
[개설]
찬궁은 통상 왕과 왕후의 상에만 쓰이는데, 1457년(세조 3) 9월에는 당시 사망한 세자에 대해서도 찬궁을 사용하였다. 재궁을 가매장하는 형식을 빌려 찬궁에 안치하고자 만들었다. 집 모양과 유사하며, 사면에는 사신도(四神圖)를 붙였다. 찬궁을 설치하는 공간은 빈전이다.
[내용 및 특징]
찬궁은 대렴 전에 만들었다. 그 제도를 1446년(세종 28) 3월 세종대의 국상 때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먼저 벽돌을 땅에 깔고 석회로 그 틈을 발라서 터를 다진 다음에, 사각의 나무를 바닥에 설치하고 그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기둥 위에는 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서 벽을 만들어 집 모양과 같이 만들었다. 다만, 동쪽 벽은 비워서 대자리[竹簟]를 안쪽의 삼면(三面)과 위에 붙이고, 대나무 조각으로 만든 가로 세로 못을 끼운다. 또 두꺼운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주작(朱雀)·현무(玄武)·청룡(靑龍)·백호(白虎) 등 사신도를 그려서 방위에 따라 붙였다. 그 외의 삼면과 상면(上面)에는 먼저 진흙을 바르고, 정포(正布)와 두꺼운 종이를 차례로 바르며, 유둔(油芚)과 지의를 안에 펴놓았다. 발 없는 평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대자리와 욕석을 펴놓았다.
성빈할 시간이 되면, 내시(內侍)가 재궁에 저사(紵絲)로 된 소관의(小棺衣)를 덮고, 연폭(連幅)의 유지(油紙)를 여러 겹 덮는다. 그리고는 흰 생초(生綃)를 사용해 종횡으로 묶는다. 함께 재궁을 들어서 평상 위에 안치하는데, 머리는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 위에는 도끼무늬를 그린 대관의(大棺衣)를 덮는다. 비워두었던 동벽(東壁)을 들어다 막고 못을 박아서 튼튼하게 한 다음, 진흙과 정포, 두꺼운 종이를 차례로 바른다. 이를 마치면 휘장을 설치한다.
이렇게 제작하여 재궁을 모신 찬궁은 빈전 가운데에서 약간 서쪽에 설치했다. 그 앞에는 영좌를 설치하고, 동쪽에는 휘장을 설치하여 그 안에다 영침을 진설했다.
찬궁에 재궁을 안치할 때에는 머리의 방향을 남쪽으로 하는 것은, 아직 어버이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실제 방위의 남북이 아니라 궁실의 향배에 따랐다.
발인할 때에는 그 전에 먼저 계빈의를 거행했다. 전제(奠祭)를 마친 후에, 동판내시(同判內侍)가 여러 내시를 거느리고 올라가서 찬도(攢塗)를 걷어치운다. 걷어치우기를 마치면, 동판내시가 수건으로 재궁을 닦고 관의로써 덮고, 내시가 빙 둘러 밧줄로 매고 물러간다. 그 후에 찬궁은 정결처에서 불에 태운다.
[변천]
1446년에 규정된 성빈의는 『세종실록』 「오례」 흉례 성빈조에서 약간의 수정보완이 가해졌다. 여기에는 찬궁 터의 높이가 5촌가량이며 사면은 각각 2척을 더 넓힌다고 했다. 사방 기둥의 높이는 5척이며, 가노(椵繩)와 세목(細木)으로 벽을 만들고, 안의 3면과 위에는 갈대자리[蘆簟]를 붙인다고 했다. 계빈의에서도 찬도를 걷어치우는 일은 선공감(繕工監) 소속 관원들이 담당했으며, 재궁을 깨끗이 닦는 작업은 우의정(右議政)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의의]
사대부 이상은 발인하기까지의 상례 기간이 한 달 이상으로 시신이 부패할 염려가 있었다. 이에 구덩이를 파서 가매장하는 절차가 행해지기도 했다. 왕은 이러한 가매장 장소로서 별도의 상구를 마련해 행하였다. 신분에 따라 격식을 달리하는 예의 차별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산릉의 광중을 모방한 찬궁의 구조와 그 의미를 되새겨 당시 사람들의 상례 의식과 내세관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