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능(陵)·원(園)·묘(墓)의 봉분(封墳) 앞에 조성한 문관(文官) 복장의 석인(石人).
[내용]
문석인은 관(冠)을 쓰고 관대(官帶)를 두르며 홀(笏)을 잡고 서 있는 형상으로 조각되었는데 이는 국상(國喪) 때 문무백관을 형상화한 것이다. 상계(上階)에 석마(石馬)와 함께 1쌍으로 조성되어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하였다. 문석인의 규모는 각 능 원 묘가 모두 다르나 관대를 하고 홀을 잡고 있는 모습은 각 능 원 묘가 모두 같다.
문석인의 외형은 크게 복두공복형(幞頭公服型)과 금관조복형(金冠朝服型)으로 나눌 수 있다. 복두공복형은 복두와 포(袍), 홀(笏), 흑피화(黑皮靴), 야자대(也字帶)로 되어 있고, 금관조복형은 양관(梁冠)과 적초의(赤綃衣), 폐슬(蔽膝), 품대(品帶), 패옥(佩玉), 후수(後綬), 홀, 혜(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전기 이래 복두공복형이 조성되다가 왕릉의 경우 정조의 건릉(健陵)에서 금관조복형 문인석이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원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 묘는 광해군묘(光海君墓)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용례]
禮葬都監回啓曰 (중략) 文石人象 著冠帶 執笏之狀 武石人象 著甲冑 佩劍之狀 此乃國喪象文武百官之制也 [『인조실록』 4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