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부모의 상중에 편안한 잠자리를 가질 수 없다는 유교사상에 따라 상주는 빈전(殯殿) 근처에 허름한 임시 천막을 지어 여기서 지냈다. 이를 여차라고 하고 여막(廬幕)이라고도 하였다. 상주인 세자의 여차를 의려(倚廬)라 부르는데, 빈전의 중문 바깥에 설치하고, 대군(大君) 이하 왕자의 여차는 의려의 동남쪽에 설치하였다. 반면에 왕비와 왕세자빈(王世子嬪), 내명부(內命婦) 이하 사람들의 여차는 전(殿) 안의 별실에 따로 여차를 설치하였다. 여차의 운영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사망 시에는 별도로 운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420년(세종 2) 7월 10일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사망하면서 본격적으로 설치·운영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422년(세종 4) 5월 10일 태종이 사망한 뒤 그 체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다. 이때의 여차는 한 칸으로 띠[茅]를 이어서 만들었는데, 매일 조석전(朝夕奠) 및 상식(上食)을 올릴 때에 왕이 궤연(几筵) 곁에 모시고 있다가, 제사를 마친 뒤 여차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국상 중에 시행되는 흉례의 전 의식은 왕이 거처하는 여차를 중심으로 그 동선이 이루어지며, 왕이 주관하는 국정 역시 이 여차 앞에서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