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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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棍杖)

서지사항
항목명곤장(棍杖)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 치도곤(治盜棍)
관련어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흠휼전칙(欽恤典則), 포도청(捕盜廳), 대전통편(大典通編)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적을 다스릴 때에 사용되던 형장의 하나.

[개설]
곤장(棍杖)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刑杖)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 태는 가느다란 회초리처럼 길이가 1m가 조금 넘고 지름이 1㎝가 채 안되었다. 그리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반면 곤장은 배를 젓는 노와 같이 길고 넓적하게 생겨서, 강도가 태와 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한말 선교사들이 남긴 견문기에서는 불과 몇 대에 피가 맺히고 10여 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곤장을 맞던 죄인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검색해보면 조선초기부터 곤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곤장은 조선전기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조선전기에 없었던 곤장이 정확히 언제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라는 법전에 보면 순치 연간(1644~1662)에 제정된 법규 가운데 "군병아문(軍兵衙門)이 아닌 곳에서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문이 나오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법전 조문상 가장 이른 시기의 곤장에 관한 규정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곤장에 대한 용례가 이보다 조금 더 앞선다. 즉, 『조선왕조실록』에는 1599년(선조 32) 9월 17일에 함종현령 홍준(洪遵)이라는 인물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부당하게 피해자 가족에게 곤장을 가한 죄로 장령의 탄핵을 받고 있다. 이로써 대략 선조 연간 무렵부터 곤장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선조실록』 32년 9월 17일].

선조대 무렵부터 사용되던 곤장은 군영이나 포도청·진영·토포영 등 군법(軍法)을 집행하거나 도적을 다스리는 기관에 한해서 사용을 허락하였는데, 사용 방법은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이후 곤장에 관한 세부적인 조처들도 마련되었는데, 1663년(현종 4)에는 곤장의 재질을 버드나무로 정하였고, 1685년(숙종 11)에는 아예 30대 이상 치지 못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변천]
『흠휼전칙』에 따르면 곤장은 모두 다섯 가지가 있었다. 이 다섯 가지는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 치도곤(治盜棍)을 말하는데, 이 중 길이는 중곤(重棍)이 가장 긴 약 181㎝쯤 되는 반면, 타격부의 너비와 두께는 치도곤(治盜棍)이 각각 16㎝, 3㎝ 내외로 제일 두텁고 크다.

『흠휼전칙』에 따르면 조선후기 곤장을 사용할 수 있는 관리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는데, 먼저 중곤(重棍)은 병조판서, 군문 대장,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가 죽을죄를 저지른 자를 다스릴 때만 쓸 수 있었다. 대곤(大棍)은 군문(軍門)의 도제조, 병조판서, 군문 대장, 중군, 금군 별장,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및 2품 이상의 고위직 군무사성(軍務使星)이 사용할 수 있었다. 중곤(中棍)은 내병조, 도총부, 군문의 종사관, 군문의 별장, 천총, 금군장, 좌우순청, 영장, 겸영장, 우후, 중군, 변방의 수령, 사산참군, 3품 이하의 군무사성이 사용할 수 있으며, 소곤(小棍)은 군문의 파총, 초관, 첨사, 별장, 만호, 권관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치도곤(治盜棍)은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겸토포사, 변방의 수령, 변장(邊將) 등이 도적을 다스리거나 변정(邊政)·송정(松政)에 관계된 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흠휼전칙』에 정한 곤장에 관한 규정은 법전인 『대전통편』에까지 실렸으며, 이후에도 군무(軍務)에 관련된 죄인을 다스리는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만 곤장 사용이 허락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처벌 대수까지 세밀하게 명시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19세기에 만들어진 당시 대표적인 중앙군인 훈련도감에 관한 사례를 모은 책자인 『훈국총요(訓局總要)』를 보면 별장·천총 등 장교들이 소속 군인에겐 15대, 소속이 다르면 7대 이상 곤장을 치지 못하도록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감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 고을 수령들이 규정과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형장을 남용하여 예사로 곤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고을 수령들이 법을 집행할 때 통쾌한 맛을 느끼고자 태·장보다는 곤장을 즐겨 사용하는 당시 세태를 강하게 꼬집고 있다.


[의의]
조선시대 규정에 의하면 변방의 수령 등 군사권을 쥔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지의 작은 고을 수령들은 곤장을 사용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지방 사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으레 곤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같은 행위가 당시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다. 곤장은 조선시대 행형(行刑) 및 형벌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검토해야 할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참고문헌]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훈국총요(訓局總要)』
■ 『목민심서(牧民心書)』
■ 『흠휼전칙(欽恤典則)』
■ 서일교, 『朝鮮王朝 刑事制度의 硏究』, 韓國法令編纂會, 1968.
■ 심재우, 「정조대 『欽恤典則』의 반포와 刑具 정비」, 『奎章閣』22, 1999.
■ 심재우, 「조선후기 형벌제도의 변화와 국가권력」, 『國史館論叢』102, 2003.

■ [집필자] 심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