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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영조대에 진휼용 환곡으로 삼기 위하여 병조와 각 군문에서 징수하는 군포를 쌀로 바꾼 것.
[내용]
흉년 대비 진휼용으로 조성된 환곡(還穀)이 18세기에 들어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였다. 풍년시에 흉년 대비용 곡물을 비축하자는 논의 속에서 1729년(영조 5)에 병조·금위영·어영청 재원 110,000석을 토대로 군작미(軍作米)가 처음 창설되었다. 군작미란 군보가(軍保價)를 포(布) 대신 미(米)로 거두어 비축용 환곡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풍년이 들었을 때 연해 지방은 곡가가 천하고 면포가 귀해졌으며, 또한 전황(錢荒)의 시기에 각 군문에 면포를 납부하는 군민(軍民)에게 면포 대신 쌀을 징수하여 손쉽게 비축 곡물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처음 창설 이후 모두 7차례 더 설치되었는데, 1734년(영조 10)에 33,000석, 1735년(영조 11)에 110,000석, 1748년(영조 24)에 30,000석, 1749년(영조 25)에 90,000석, 1750년(영조 26)에 100,000석, 1754년(영조 30)에 60,000석, 1770년(영조 46)에 40,000석이 각각 만들어져 진휼 외에 호조 지출 부족분, 대동 저치미 부족분 등에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