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자료문의 :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30-8765
[정의]
납속(納粟)한 승려에게 수여하는, 수취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관직·관작의 백지 임명장.
[내용]
공명첩(空名帖)은 임진왜란 때부터, 군공을 세운 사람 또는 흉년이나 전란 때에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납속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대가로서 주어졌다. 그러나 그 뒤 국가의 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 진휼을 위해서, 혹은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얻기 위해 발행하였다. 특히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명산 고찰, 관방(關防)의 요지이거나 사고(史庫)가 딸린 사찰 등의 영조나 수리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경우라면, 일반적인 공명첩뿐 아니라 승려에게 발매할 수 있는 승공명첩(僧空名帖)이 함께 발행되었다. 속첩(俗帖)과 승첩(僧帖)이 함께 발행된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 산성의 축성역에서는 성내에 사찰을 지어 상주하는 승병으로 활용한 일이 많았다. 예컨대 1691년(숙종 17)에 강화의 용당곶이[龍唐串] 나루에 사찰을 지어 승병이 머물 수 있게 하는 데 수십 장의 승공명첩이 발급되었다든지, 1709년(숙종 35)에 동래 금정산성 내의 승영(僧營) 사찰인 국청사(國淸寺)와 해월사(海月寺)의 건립과 유지 비용에 보태기 위해 공명첩과 승공명첩 70장을 발급한 일, 1796년(정조 20)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와 여주 신륵사(神勒寺)의 중건을 위해 승공명첩 250장이 발급되었던 일 등을 들 수 있다.
공명첩이 그랬듯이, 승공명첩을 발급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폐해가 초래되었다. 숙종대의 강화 용당곶이의 용당사(龍唐寺) 건립을 위해 처음에는 30장의 승공명첩이 주어졌으나, 이 가운데 정3품에 해당하는 통접첩(通政帖)만 팔릴 뿐, 종2품의 가선첩(嘉善帖)은 비싼 가격 때문에 팔리지 않았다. 결국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승첩 20장을 추가로 발급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745년(영조 21)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의승(義僧)을 대상으로 승공명첩을 강매한 일이 드러나서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승공명첩의 발급은, 공명첩의 발급이 그러했듯이,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를 촉진하는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