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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세기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관서에서 주관하는 역사에 고용되었으며, 단순 작업의 비숙련노동에 종사했던 막일꾼.
[개설]
모집한 인부, 공사장의 잡역부 등의 뜻을 갖는 이 용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오늘날의 국어사전에서 ‘모군’은 ‘토목공사 같은 데서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사람’으로서 ‘모군(募軍)군’과 같은 뜻으로 설명한다. 또한 ‘모군·모군꾼·모꾼’은 모두 ‘공사판 같은 데서 품팔이하는 사람’이며, ‘모꾼삯’은 ‘모꾼의 품삯’으로, ‘모꾼일’이란 ‘토목공사 같은 일’, ‘모꾼서다’란 ‘모꾼이 되어 일하다’ 등으로 풀이한다.
모군에 관한 이 같은 개념은 17세기 이후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역군을 모집한다’는 뜻의 서술어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모집한 역군’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굳어졌다. 부역노동이 쇠퇴한 것에 반비례하여 모군을 고용하는 모립제는 확대되었다. 토목공사뿐 아니라 운송노동을 비롯한 각종 잡역 분야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오랜 부역노동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부세 체계 내에 실로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고용노동이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조성되었다.
[내용]
1606년(선조 39) 종묘(宗廟)·궁궐의 중건공사에서 시행된 바 있었던 결포제(結布制)는 17세기 초·중엽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한 경비 확보책으로서, 특히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군의 고가(雇價)를 조달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실시되었다. 이 같은 조치는 대동법과는 별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요역의 대납제(代納制)를 수용하는 것이 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각종 대규모 역사에서 전면적으로 모립제가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모립제의 성립 발전은 부역노동 개편의 소산이었다.
모군 가운데 경모군(京募軍)은 주로 도성 내외에 거주하는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 곧 품팔이로서 직업을 삼는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모군 중에는 다른 생업을 가지면서 여가 시간에 고용되는 부류도 있었으나, 대체로 임금노동을 생활수단으로 삼는 임노동자층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도시 빈민층이었다. 향모군(鄕募軍) 역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농한기의 계절노동에 고용되는 영세농민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촌사회의 임노동자층이었다. 후자의 비중이 차츰 높아지면서 농촌사회에서의 모립제도 발전하고 있었다.
모군들은 종래의 부역노동과는 전혀 다른 조건 하에서 각종 노역에 고용되었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자 스스로 역사에 응모하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추가적인 사역이 있을 때에는 별도의 수당을 지급받는다든지,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나 도구를 역소에서 제공받는다는 점 등이 그러하였다. 그뿐 아니라 모군들은 작업 환경을 비롯한 작업 조건의 개선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것이 용납되지 않으면 당초 응모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퇴거할 수 있었다. 때로 이 같은 양상은 집단적·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일시에 흩어져 버림으로써 작업을 전면 중단시키거나, 공역의 주관자에게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이는 부역노동 하의 징발역군들이 부역기간에 자기가 먹을 식량마저 스스로 마련하여 징발되던 것과 질적으로 구별되었다.
고가를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는 17세기 이후의 각종 노역에서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점차 대두되었다. 17세기 초·중엽에는 한때 부정기적인 결포의 징수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뒤에는 점차 세미(稅米)와 군포(軍布)의 수입이 모군의 고가로 충당되었다. 역사의 규모가 방대할 경우에는 그 밖의 다른 재원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특별한 사정으로 응모자가 많거나 적게 될 경우, 고가는 인하되든지 인상되었다. 고가는 작업한 날의 수에 따라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처음에는 미(米)와 포(布)의 현물로서 지급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점차 화폐로 지급됨이 관례화되었다.
모립제 하의 모군들은 관에 고용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예속 관계에서 현저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역사에 응모할 뿐 아니라 역시 자유롭게 퇴거할 수 있었다. 작업 조건이나 고가에 불만이 있을 경우 모군들의 반응은 집단적·조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고가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만 이합집산할 뿐, 관의 통제 아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모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종류의 각종 역사에 전문적으로 고용되고자 했던 주민들이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나 형성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계층분화의 소산으로 광범위하게 배출되고 있었던 이농민의 대열이 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담당 직무]
산릉역(山陵役)의 경우, 17세기 초엽 이후 부분적으로 모립제가 적용되기 시작하였고,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면적으로 이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농민층이 광범위하게 분화되기 시작하였고, 몰락한 농민의 일부는 농촌의 농업 노동자나 도성 주변의 도시 빈민층 혹은 광산의 점군(店軍)으로서 전신하고 있었다. 산릉역 등의 각종 토목공사를 전담했던 모군은 그와 같은 사회변동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던 중세말기의 임노동자층의 한 형태에 속하였다. 그들은 산릉역 외에도 영건역(營建役)·축성역(築城役) 등을 비롯하여 제언(堤堰) 수리, 길 닦기, 개천 준설 등의 각종 토목공사에서, 또 장빙(藏氷)·주전(鑄錢) 등의 노역에서 종전의 징발역군을 대신하는 고용인부로서 동원되고 있었다. 모군들은 이처럼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잡역에서뿐 아니라, 담군(擔軍)·부지군(負持軍) 등과 같은 일상적인 운송 부문에서 혹은 민간 부문의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임노동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변천]
17세기 초엽 모립제 시행 초기에는, 때때로 모군으로 고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1606년(선조 39) 병조에서, 임진왜란 중에 파괴된 궁궐을 재건하는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서 가포(價布)를 지급하고 역군을 모집하려 했으나, 응모자가 매우 적었다고 하였다. 아직은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인원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각종 공역에서 모립제가 적용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났다. 징발역군이 줄어드는 만큼 모립하는 고용인부의 비중은 늘어갔고, 18세기 이후에는 결국 토목공사장의 단순 잡역을 전담하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립제 성립의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모립할 수 있는 노동력, 곧 임노동자층 성립의 문제였다. 17세기 초엽부터 일부 몰락한 농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여 도회지로 유입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직 충분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이 모군으로 고용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품팔이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직업인군이 도성 주민의 일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민으로 도성에 흘러 들어온 것인데, 다시 농촌의 전호(佃戶) 농민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임노동을 통해서 토지로의 반복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주민 집단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 생활수단을 발견하였다.
[의의]
모군은 토지로의 반복 순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노동에서 자신의 생활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던 도시와 농촌의 빈민층을 구성하였다. 임노동으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는다는 것은 관에서 고용하는 모립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민간의 생산·비생산 분야에 고용되는 것을 통해 가능하였다.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임노동자층이 형성되어 가고, 한편에서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